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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집>

Alice12 2022. 2. 14. 0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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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을 다스리는 느낌

나는 한 번에 메모장을 몇 권씩 쓴다. 당장 메모할 게 생겼는데, 쓰던 메모장을 찾지 못하면, 새 메모장을 꺼내니까. 여분의 메모장을 수십 권씩 갖고 있다 보니, 아무래도, 새것을 조금 쉽게 쓰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책장 위 공간이 수만 평은 아니기 때문에, 메모장들이 서너 권 정도 모이면 새것을 더 꺼내지 않긴 하지만.

아무튼 나는 1년에 두어 번씩 내 메모장들을 한데 모은다. 모아서 그것들을 정리한다. 다 써 가는 것들 위주로 책상 바로 옆에 놓아둔다. 거의 쓰지 않은 것들은 손이 잘 안 닿는 곳에 두고.

그 일을 어제 했다. 그러다가 독서 메모장을 다시 읽어 보았다. 그 메모장은 내가 작년에 쓰던 메모장이었다.
나는 책을 읽을 때 항상 메모장을 옆에 두고 뭔가를 적는다. 책 속 문장들을 받아 적기도 하고, 그냥 떠오르는 생각들을 적기도 한다. 책 내용과 상관없는 낙서를 할 때도 있다. 이를테면 누군가의 이름을 메모장에 여러 번 적어 놓는다든지... 잡생각이 들 때 그걸 메모장에 옮겨 놓으면, 다시 독서에 집중할 수 있어서. 아니면 독서보다 그 잡생각이 더 중요해서.

"바라보면 사라진다."
많은 선승들이 말했다. 마음으로 올라오는 것들에 반응하지 말고, 그것을 그저 바라보면, 그것들이 저절로 자라질 거라고.
우리에게는 눈이 여러 개 있다. 몸에도 눈이 있고, 마음에도 눈이 있고, 몸과 마음을 바라보는 또 다른 눈도 있다. 메타 인지를 가능하게 하는 눈이라고 할까. 자신의 인지 활동을 관찰하고 조절하고 통제하는 것을 메타 인지라고 한다. 쉽게 말하자면, 자기 생각을 생각하는 것이다. 자기 성찰...
우리는 우리의 인지만 파악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의 감정도 파악할 수 있다. 느낌으로.

감정(emotion)이 신경계에서 일어난 생물학적 반응이라면, 느낌(feeling)은 감정을 수용하고 해석하는 기능이라고 한다. 감정은 뇌의 가장 원시적인 부분인 변연계와 관련이 있다. 느낌은 전두엽과 관련되어 있다고 한다. 전두엽은 감정 통제, 계획, 의사 결정과 관련되어 있다. 감정은 생존을 위해 개인에게 탑재되어 있는 일종의 시스템이다. 감정은 반사 반응 같아서, 우리가 멋대로 차단할 수 없다. 대처할 수밖에 없다.

감정을 다스리는 일은 느낌을 바라보는 일에서 시작된다. 이 감정에서 나는 무엇을 느끼는가. 느낌은 해석이기 때문에 우리가 바꿀 수 있다. 일차적인 느낌은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을지 몰라도, 이차적인 느낌, 삼차적인 느낌은 우리가 어떻게 해 볼 수 있다. 감정 자체가 너무 강렬하면, 느낌을 수정하는 게 어렵겠지만...
아무튼, 우리가 감정을 해석하는 방식을 바꾸면, 감정의 위력을 통제할 수 있다. 분노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에게 분노가 머무는 시간이 달라질 수 있다.
이것은 화를 낼 만한 일인가, 화를 낼 만한 일이 아닌가.

나는 감정을 하나의 현상으로 보는 안목을 기르고자 하였다. 과거에 나는, 나에게서 일어난 감정들이 전부 내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그것들을 선택하고, 취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자주 죄책감에 시달렸다. 물론, 나는 내 감정에 책임을 져야 한다. 내가 그것을 원치 않았다는 이유로, 의도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나 자신 표출한 어떤 감정을 남의 책임으로 돌릴 수는 없다. 내 감정은 내 잘못이 아니지만, 명백한 내 책임이다.

내 감정이 나와 타인을 해치지 않게 하려면, 나는 내 감정들을 부지런히 느껴 보며, 그것들의 수위를 통제해야 하겠다. 일차적인 감정은 통제되지 않는다. 일차적인 감정에 대한 내 느낌은 우리가 통제할 수 있다. 어떤 감정에 대한 우리의 느낌은 그 감정을 증폭시킬지 축소시킬지 결정한다. 느낌은 감정에 먹이를 주거나 뺏는다.
느낌이라고 해서 다 우리 것인가. 다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인가. 무언가에 대한 해석은 무의식중에 일어날 수도 있다. 그러니 우리의 느낌 전부가 우리의 의식적인 선택에서 비롯된 건 아니겠다.

내가 정말로 깨어 있지 않으면, 나는 내 느낌의 주도권을 남에게 줘 버리게 된다. 결국 이 모든 게 '깨어 있기'의 문제로 귀결된다. 어딘가에 휘둘리거나 휘말리지 않고,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는 것. 그러려면 일단 몸이든 마음이든 멈출 줄을 알아야 하고, 멈춘 다음에는 거리를 둘 줄 알아야 하겠다. 사건과, 사람과 마음과.
문제와 뒤섞여 있을 때 나는 반응을 하지만, 문제와 거리를 두고 있을 때 나는 대응을 할 수 있다.

마음을 만들어 나간다는 것이 가끔은

말도 안 되게 무딘 조각칼 하나를 가지고 먼 우주의 행성을 느리게 다듬는 일 같을 때가 있다. 어째서일까. 아무리 삶이 고단해도 마음에서 손을 떼고 살 수는 없는 것이. 마음 편하게 살고 싶다는 것과 마음을 버리고 산다는 것은 다르다. 마음씨 온화한 사람을 만날 때마다 그 사람이 걸어온 시절들을, 그 사람이 걷고 있는 골목들을 섣불리 판단하지 않으려고 나는 부단히 노력해야 할 것이다. 내가 그 노력에 정말 아낌이 없을 때, 내 절실함이 덥혀 놓은 마음 옆으로 다가온 사람이 내 마음의 역사를 차분히 읽게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내가 마음을 알려고 하는 사람이 먼저 되어야, 마음을 알려고 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그런 만남은 서로를 조용하게 파악한 마음들끼리 기쁘게 동해서 이루어진다. 마음이 어떤 걸 확신할 때, 마음이 어떤 걸 괜찮다고 말할 때, 내 안에서 솟구쳐 오르는 문장 없는 희열을 생각한다.

나와 비슷한 사람, 나와 다른 사람

뭘 하나 하면 꾸준히 하는 사람을 좋아한다. 내가 그런 사람에 가까울 때 나 스스로를 제일 좋아하기도 한다. 진득한 구석을 찾아 볼 수 없는 사람은, 아무리 다른 매력을 많이 가지고 있어도 매력적이지 않다. 나에게는 그렇다. 그런 걸 보면, 나는 차이점보다는 공통점에 끌리는 사람에 가깝다. 내가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사람(물론 그 사람이 자발적으로 그 방향을 택했을 때에 한한다)과 나란치 걷고 싶어 하는 경향이 내 안에 크게 자리하고 있다.

한편 '뭔가를 꾸준히 하는 것'과 '뭔가를 꾸준히 해서 좋은 결과를 얻는 것'은 다르다. '당신이 미래에 반드시 성공할 거라서, 내가 당신의 진중함과 성실함을 좋아하는 건 아니다.'라는 언질을 해 두는 건 생각보다 중요했다. '나는 당신의 성공을 전제하고 당신의 과정을 응원하는 게 아니다.'라고 상대에서 확신을 주는 일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상대에 대한 내 마음이 쉽거나 간단해 보이지 않기 위해서는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하나?'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을 가장 특별한 사람의 언어로 바꾸는 것은 정말 작은 디테일의 차이인데, 그 미미한 디테일의 차이를 찾아내서 활용하기 위해서는 노력이 투자되어야 한다.

사람을 알려면 사람을 수없이 보아야 하고, 거기에서 뭔가 의미 있는 것들을 선명하게 느껴야 한다. 자꾸 그래 버릇해야 한다. 그래야 상대가 보내는 중요한 사인들을 놓치지 않을 수 있다. 관계에 대한 감각 기능을 비롯한 모든 감각 기능은 연습으로 단련된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변화 그 자체보다 변화를 향한 절실함이 더 큰 감동이 되는 경우도 있다. 내 경우, 내가 정말 더 나은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을 쏟은 것이 관계의 터닝 포인트가 되어 줄 때가 많았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고, 각자의 작은 한계를 하나씩 무너뜨리며 조금씩 성장하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목표치는 언제나 멀고, 오늘 나의 가능성을 보여 줄 시간은 오늘로 충분하다.

사람으로 인한 설렘은 늘 그런 식이었다

오감은 어지럽게 복잡하고 존재감은 명쾌한 그 절정의 그 절정의 순간 속에서, 나는 문득 눈짓으로 주위를 느리게 살피며 내가 여기에 있음을 감각했다. 흐르는 시간 속에 잠시 멈추어진 채로, 나라는 존재의 현실성을 낯선 신비에 대한 폭로 들여다보았다.
사람으로 인한 설렘은 늘 그런 식이었다.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고부터 내 존재가 내 존재를 저절로 살피는 횟수가 늘었고, 따라서 내 삶이 자각되는 횟수도 늘었다. 세상은 그대로이지만 내가 바라보고 매만지고 쓰다듬고 끌어안는 세상은 놀랍도록 팽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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