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해질 용기>
1장
우리의 말과 행동은 아무도 없는 진공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마주하는 상대방과의 관계 속에서 말과 행동의 의미를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 아들러 심리학의 중요한 특징이다.
아들러는 "인간의 모든 고민은 대인관계에서 비롯된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개인심리학은 분할되지 않는 통일된 전체로서의 개인을 고찰하는 심리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아들러는 인간을 정신과 신체, 감성과 이성, 의식과 무의식으로 나누는 다양한 형태의 이원론에 반대했다.
이는 인간의 마음속에서 상반된 판단을 하는 두 가지 부분이 갈등상태에 있다는 생각이 아니다.
아들러는 전체로서의 '나 자신'이 어떤 행위를 선택하는 것이므로 그 선택을 '나 자신'이 오롯이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들러는 이처럼 분할할 수 없는 전체로서의 개인이 자신의 목적을 세우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행동한다고 생각했다.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할 때면 그런 행동을 야기하는 원인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 원인을 찾으려 하기 마련인데, 아들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무언가를 한다거나 하지 않는다는 목적을 먼저 세우고, 그 목적을 달성하는 수단을 생각해낸다는 뜻이다.
단순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열쇠는 원인론적 발상을 목적론적 발상으로 바꾸는 데 있다.
우리는 원인론적으로 생각하는 데만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행동이나 감정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살피기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하다.
첫째, 감정이 우리의 행동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며, 목적이 있어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둘째, 지금 자신의 감정의 원인이 과거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지금 안된다고 자각하고, 지금의 자신을 어떻게든 바꿔야 한다고 마음먹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변화하기로 결심했다면 어떻게 변화할 것인지를 알아야 한다.
어떻게 변화할 것인지가 바로 목적이 된다.
하나하나의 행동은 자신을 위한 것이다.
그리고 그런 행동의 궁극적인 목적이 바로 행복이다.
아들러는 "라이프스타일을 스스로 선택한다"라고 하며, 이것이 아들러 심리학의 기본이다.
아들러가 행복에 관해 한 말을 라이프스타일과 관련지어 아주 간단하게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인생이 복잡한 것이 아니라, 내가 인생을 복잡하게 만드는 것이다. 스스로 인생을 복잡하게 만들어서 행복한 삶을 방해한다. 인생에 대한 '의미 부여(라이프스타일)'를 바꾸면 세상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단순해진다."
'의미 부여'라는 것은 인생이나 세상 혹은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방식이다.
세상이나 자신에 대한 의미 부여가 바뀌면 세상과 마주하는 법은 물론 행동까지 바뀐다.
"자신의 라이프스타일을 지금 깨달았다면,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는 그 라이프스타일을 깨달은 본인의 책임이다."
2장
무엇을 하면 좋을지, 어떤 선택을 하면 좋을지, 무엇이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지 혹은 도움이 되지 않는지 판단할 때의 경향이나 패턴을 라이프스타일이라고도 할 수 있다.
아들러는 "중요한 것은 무엇이 주어졌느냐가 아니라, 주어진 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다"라고 말했다.
'지금의 자신을 다른 자신으로 바꿀 수 없다면, 이런 자신에게 이전과는 다른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자신을 달라 보이도록 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는 자기 자신을 좋아할 수 있게 만드는 하나의 방법이다.
자기 자신을 좋아하기로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첫째, 라이프스타일을 스스로 선택했다는 사실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둘째, 지금까지의 라이프스타일과는 다른 라이프스타일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라이프스타일을 바꾼다고 해도 지금까지 소극적이었던 사람이 하룻밤 사이에 활달하고 밝은 사람이 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러나 자신의 성격을 어둡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도 자신을 바라보는 방식을 바꾸는 것은 가능하다.
자신을 실제보다 더 좋게 꾸미려 해서는 안 된다.
자신을 잘 보이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지금 당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는 사람은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자신을 위해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지 못한다면, 대체 누가 자신을 위해 살아갈 수 있는가?'라는 유대교의 격언이 있다.
인생의 주인공은 나 자신이다.
자기 자신에 관해 부정적인 견해를 품는 이유는 남들과 적극적으로 대인관계를 맺지 않으려 들기 때문이다.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바꿈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새로이 발견하는 것은 대인관계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는 데 필요한 일이다.
부모를 비롯한 제3자로부터 듣는 속성 부여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오히려 다른 누군가가 무슨 말을 하든 자신과는 상관없다고 여겨도 괜찮다.
남들의 기대에 맞추거나 그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가치는 남에게 공헌함으로써 얻을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어떻게든 자신이 남에게 도움이 된다고 느낄 만한 일을 찾으려고 한다.
자신이 어떤 형태로든 남에게 공헌한다고 느끼면 자신에게 가치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고, 스스로를 좋아할 수 있게 된다.
남에게 무언가를 주거나 공헌할 때 자신을 뒷전으로 미루고 자기희생을 한다고 생각하기보다 남을 위해 행동하는 일 자체가 자신에게 기쁨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좋다.
남을 위하는 일이 꼭 대단한 행동일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강요된 일이라거나 억지로 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 자발적인 행위이며 그 행위에 의해 무언가를 기대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남들이 알아주거나 고맙다는 말을 해주지 않아도 그 행위 자체에 가치와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남들의 각별한 관심이 없더라도 남들에게 공헌하고 있다고 스스로 느낀다면 소속감은 덤으로 얻을 수 있게 되고, 소속감으로 충만한 자기 자신도 좋아지게 된다.
굳이 남들에게 인정받기를 원하면서 도움을 주는 행위는 단순한 자기만족에 지나지 않는다.
남에게 무언가를 기대하지 않아도 자신이 남에게 도움이 된다고 느끼는 것만으로도 자기 자신을 좋아할 수 있는 힘이 된다.
여기서 조심해야 할 점이 두 가지 있다.
첫째, 남들의 관심이나 인정은 필요 없다고 말했는데, 이는 타인, 사회와의 연결 고리가 필요 없다는 뜻은 아니다.
둘째, 특별한 일을 하지 않더라도 자신이 남들에게 공헌하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3장
아들러는 남들을 동료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들러는 '공동체 감각'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는데, 이를 쉽게 말하면 모든 사람은 동료이며, 그런 사람들이 서로 이어져 있다라는 뜻이다.
동료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사람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더 나아가 공헌하거나 협력하려고 한다.
이로써 주제는 '남들을 어떻게 볼 것인가, 남들과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에 관한 문제로 넘어가게 된다.
그러나 남들이 상처 주는 무서운 사람이 아닌, 필요하다면 언제든 자신을 도와줄 수 있는 동료이자 친구라고 생각하는 것도 생각만큼 간단하지 않다.
자기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도 남이기에 완전히 믿을 수 없는 게 보통이다.
내가 남들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듯, 남들도 나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각자가 자신의 생각대로만 살 수도 없는 노릇이다.
남들이 해주기를 바라는 일, 하지 않기를 바라는 일도 당연히 있다.
그럴 때는 다른 사람에게 자신이 원하는 바를 효과적으로 전달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자신과 똑같은 권리를 갖고 있는 남들에게 자신이 원하는 바를 명령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부탁하는 말투를 사용해야 한다.
부탁은 명령과 달리 상대방에게 거부할 여지를 남겨주는 말투다.
부탁을 받으면 명령을 받을 때와 달리 대부분 흔쾌히 승낙한다.
그러나 승낙하는 것은 그 사람의 호의일 뿐이지 의무는 아니므로, 거절당하는 경우도 당연히 있다.
그렇다고 해서 처음부터 그 사람이 자신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 것이라고 지레짐작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필요한 것이 있다면 다른 사람에게 확실한 말로 도움을 청해야 한다.
사람은 남들의 도움 없이 혼자의 힘으로는 살아갈 수 없다.
따라서 도움이 필요하다면 서슴없이 청하는 편이 좋다.
'인간(人間)'이라는 한자에서 볼 수 있듯이 인간은 애초부터 사람 사이에서 살아가는 존재이며, 다른 사람과 유대관계가 끊어지면 살아갈 수 없다.
남들의 평가를 신경 쓴다는 것 자체가 우리의 삶에 남들이 관여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남들과 갈등이 생겨나는 이유는 상대방에게 바라는 일이 있는데, 상대방이 자기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오직 주변 사람들과만 대인관계를 맺을 수는 없을 것이다.
주변의 친한 사람은 틀림없이 자신을 도와줄 테지만, 멀리 내다보면 이 사회에서 함께 살아가는 모든 세상 사람들이 자신을 도와줄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세상이 전혀 위험하지 않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위험이 발생했을 때는 자신을 지켜주려는 사람이 평소보다 훨씬 많이 나타난다는 사실에 한층 더 주의를 기울였으면 한다.
이처럼 사람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이는 자신뿐 아니라 남들도 마찬가지다.
가끔 상대방이 자신을 적대시하는 것처럼 보여도, 기본적으로는 누구나 남들과의 관계를 떠나서 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면 한다.
아무리 자신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어도 남들의 도움을 받고 있고,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남들에게 무언가 도움을 주고 있다.
이에 그치지 말고 사람의 존재가 상호적인 관계인 이상, 가능하다면 적극적으로 남들에게 무언가를 해주겠다고 마음먹는 편이 좋지 않을까 싶다.
자신은 혼자서 완결되는 존재가 아니라 남들에게 그 존재를 빚지고 있으며, 이것은 남들도 마찬가지다.
'내가 남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게 무엇인가?'를 생각했으면 한다.
남들에게 필요한 도움을 청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문제는 스스로 할 수 있고 또한 해야 하는 일마저 남들에게 의존해버리고 자신이 직접 하지 않으려고 하는 자세이다.
나는 다음과 같은 마음가짐을 제안하고자 한다.
'나는 가능한 한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하겠다. 그리고 남들이 도움을 요청해온다면 가능한 한 받아들이겠다.'
모든 사람이 이런 식으로 생각한다면 이 세상은 분명히 행복해질 것이다.
아들러 '인생의 과제'
인생을 살아가는 데는 꼭 해결해야 하는 불가피한 과제가 있다.
이 과제는 오직 대인관계로만 풀 수 있다.
어린이는 부모의 보호를 받으면서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지만, 언제까지나 부모에게 의존할 수는 없다.
성장하고 나서는 일하지 않으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들을 손에 넣지 못하기 때문에 직업을 가져야 한다.
친구와 사귀고, 연애를 하고, 더 나아가 그 관계가 결혼으로까지 발전하기도 한다.
자식을 낳으면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도 생겨난다.
아들러는 이를 직업의 과제, 교제의 과제, 사랑의 과제 등으로 칭했고, 이 모든 것을 통틀어서 '인생의 과제'라고 불렀다.
이 중에서 교제의 과제는 직업의 과제나 사랑의 과제까지 포함한다.
직업의 과제든 사랑의 과제든 기본적으로 모두 대인관계이기 때문이다.
보통 한 사람이 모든 일을 혼자서 해내기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분업이 필요하다.
분업은 다른 사람들과의 협력이 꼭 필요하므로 대인관계 없이는 해낼 수 없다.
혼자서 하는 일도 있겠지만, 한 업무의 모든 과정을 오로지 한 사람만이 해야 하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
여기서 업무상의 대인관계는 불안정하고 오래 지속되지 않지만, 친자관계나 연애 및 결혼관계는 업무상의 관계보다 깊이가 있고 지속적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었으면 한다.
지속성과 깊이의 관점에서 보면 직업, 교제, 사랑 순으로 과제의 난이도가 높아진다.
열등 콤플렉스
강한 열등감 때문에 인생의 과제인 연애와 결혼을 못했다는 말도 일반적인 표현일 뿐이며, 실제로는 열등감이 원인이 되어 사랑의 과제를 회피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강한 열등감이 있다는 핑계로 사랑의 과제에서 도망친 것이다.
여기에서 아들러는 '강한 열등감'이라는 말을 사용했는데, '열등 콤플렉스;라는 말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조심해야 할 부분은 '열등감'과 '열등 콤플렉스'는 의미가 다르다는 점이다.
열등감은 자신이 뒤떨어진다는 사실을 느끼는 것이다.
한편 열등 콤플렉스는 'A이므로 B를 할 수 없다는 논리를 일상생활에서 자주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조심스럽다'는 자질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지나치게 조심스러우면 실패를 두려워하게 되고 과제에 도전하기보다는 도피하는 길을 택하게 된다.
이처럼 과제를 마주하는 데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은 대부분 다른 사람이 자신보다 사랑받은 경험을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다고 아들러는 지적했다.
자신이 관심의 중심에 서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스스로도 자신에게만 관심을 기울인다.
이것은 너무나 자기중심적이라고 할 수 있다.
남들이 얼마나 자신에게 주목할지, 자신에게 무엇을 해줄지,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켜 줄지만 신경 쓰는 사람은 행여 자신에게 각별한 주목을 주지 않거나 자신이 원하는 방식의 관심을 갖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동료가 아니라 적으로 여기게 된다.
공동체 감각
아들러의 치료 방침은 매우 간결하다.
현재 갖고 있는 자신에 대한 관심을 타자에 대한 관심으로 돌리는 것이다.
아들러 심리학의 핵심 개념 중 하나인 '공동체 감각'은 'Social Interest'에서 알 수 있듯이 타자에 대한 관심 그 자체다.
'Mitmenschlichkeit'은 '동료'라는 뜻이고, 전체적으로는 '사람과 사람이 이어져 있따'라는 의미다.
동료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사람에게 관심을 갖고 공헌하거나 협력하려는 것이다.
인생의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타자에 대한 관심이 발달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인생의 과제는 곧 대인관계인데, 대인관계에 무언가 해결해야 할 문제가 발생했을 때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남들이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해준다고 생각한다면 인생의 과제는 결코 해결되지 못하고 인생도 점차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라이프스타일을 알기 위해 인생의 첫 기억을 떠올려보라고 말한다.
과거에 그런 경험을 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어떠면 실제로 그런 사실이 없고 그 살마의 기억이 잘못되었는지도 모른다.
아들러는 이처럼 첫 기억을 회상함으로써 그 사람의 라이프스타일을 그릴 수 있다고 말했다.
다른 사람이 자신보다 사랑받지는 않는지, 친구가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더 좋아하지는 않는지 항상 눈을 크게 뜨고 지켜보는 사람은 우정이나 사랑을 해치는 사소한 사건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우정이나 사랑의 수명을 스스로 단축시켜버린다.
아이는 태어나서 얼마 동안은 부모에게 전적으로 의지해야만 살 수 있지만, 언젠가는 독립해야만 한다.
부모도 아이의 자립을 도와주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아이에게 과도한 애정을 쏟는 부모는 아이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조차 못 하게 막으며 자립을 방해하기도 한다.
남을 도와주거나 협력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지 않고, 오히려 그런 행동을 막으며 모든 응석을 받아준다.
아이가 스스로 해야 하는 일에 관해서도 부모가 아이 대신에 행동하고 생각하고 이야기한다.
그렇게 키워진 아이는 자연히 응석받이 특유의 라이프스타일을 발달시키게 된다.
한편 과도한 애정을 쏟지 않고 아이의 자립을 도와주려는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일지라도 의존적인 아이가 될 수 있다.
이런 사람은 인생의 과제를 자신의 힘으로 해결하기를 거부한다.
누군가 다른 사람이 자신을 위해 과제를 해결해 주는 것을 당연하다고 여긴다.
의존적인 아이는 성인이 되어도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므로, 자신이 관심의 중심에 서지 못하는 상황이나 그것을 방해하는 사람을 '적'으로 간주한다.
겉으로 보이는 인과율
인생의 과제에서 도망차기 위해서는 핑계가 필요하다.
가장 많이 등장하는 핑계가 신경증이고, 그 외에도 커다란 재해, 사건, 사고 등이 핑계로 자주 사용된다.
이 모든 핑계를 아우르는 결과로서의 트라우마(정신적 외상)가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경우도 있다.
분명히 이러한 사건들은 사람의 마음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지만, 반드시 깊은 상처를 남긴다고는 할 수 없다.
아들러는 이것을 '겉으로 보이는 인과율'이라는 말로 설명한다.
이는 현재의 사건 혹은 상황이 어떤 원인에 의해 생겼다고 설명하는 것을 말한다.
'겉으로 보이는'이라는 말은 실제로 인과관계가 없는데도 인과관계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뜻이다.
실제로 과거에 아무리 심한 경험을 했다고 해도, 결혼한 후의 부부관계는 과거와 상관없이 충분히 발전시켜나갈 수 있다.
아들러는 어떤 경험에 의해 지금의 자신이 결정된다는 의미의 결정론을 부정한다.
아들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모든 경험은 그 자체로는 성공의 원인도 실패의 원인도 아니다. 우리는 자신의 경험에 의한 쇼크(트라우마)에 괴로워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 속에서 목적에 맞는 것을 찾아낸다. 자신의 경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경험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지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좋을까?
아들러는 열등감을 줄여야 한다고 말한다.
열등감은 실제로 남들보다 뒤떨어진다는 사실이 아니라, 뒤떨어진다고 여기는 느낌이다.
따라서 본인은 열등감이 매우 신경 쓰이지만, 주변 사람들은 그가 왜 그렇게 열등감에 괴로워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스스로에게 자신감이 있다면 누군가가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더 사랑한다고 해도, 그것이 자신을 위협하는 중대한 사건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만약 다른 사람의 호의나 사랑을 받고 싶다면 그에 상응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남들이 자신에게 호감을 가져주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생떼를 부리는 것이나 다름없다.
연애와 결혼
이제부터는 인생의 과제 가운데 가장 난이도가 높은 '사랑의 과제'에 관해 생각해보고자 한다.
독일의 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은 상대방만 있으면 연애를 성취할 수 있다는 생각은 잘못되었다고 말했다.
많은 사람들은 사랑은 쉽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상대방만 있으면 연애를 성취할 수 있는 것처럼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프롬의 말처럼 사랑하는 것도 능력이다.
결혼은 시작이지 결코 끝이 아니다.
흔히 경제적인 안정이나 사회적인 지위가 결혼의 중요한 조건으로 여겨지지만, 그것은 아들러가 말하는 라이프스타일의 문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연애와 결혼에서 발생하는 문제는 다른 대인관계에서 일어나는 문제와 기본적으로 동일하다.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에게 베풀겠다는 마음 없이 오로지 받기만을 기대하는 사람은 다른 대인관계에서와 마찬가지로 사랑과 결혼에 실패할 확률이 크다.
아들러는 "사랑과 결혼의 문제는 완전한 평등을 토대로 삼을 때만 만족스럽게 해결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대등한 관계
아들러는 모든 관계가 대등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식, 경험, 책임의 양을 생각한다면 어른과 아이가 완전히 똑같을 수는 없다.
그러나 아들러는 어른과 아이가 똑같지는 않지만 대등하다고 생각했다.
이는 남녀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아들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일 남성이나 여성 가운데 어느 한쪽이 결혼 후에 상대방을 지배하려고 든다면 결과는 치명적일 것이다."
이 말은 결혼한 후에만 한정된 말이 아니라, 결혼하기 전에도 적용할 수 있다.
두 사람이 힘을 합쳐 행복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지, 누군가가 상대방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결혼을 위한 올바른 준빌르 할 수 있을까?
그 준비는 연애를 할 때부터 시작된다.
아들러는 이를 공동체 감각의 훈련이라고 말했다.
즉, 타인에게 관심을 갖는 ㅇ리이다.
공감한다는 것
결혼을 위한 또 한 가지 올바른 준비는 공감 능력을 높이는 일이다.
아들러는 이를 두고 자신을 타인과 동일시하는 능력이라고 말했다.
자신의 척도로 다른 사람을 본다면 자신과 상대방의 차이를 깨닫지 못한다.
친하다고 해서 혹은 상대방을 사랑한다고 해서 상대방을 모두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진짜 문제는 자신이 상대방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 데 있다.
상대방이 자신과 다른 시각을 갖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지도 않고 상대방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지도 않는 것이 문제다.
그래서 상대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자신을 상대방과 동일시함으로써 상대방에게 공감할 필요가 있다.
이처럼 공감하고 이해한다는 것은 자신을 상대방과 동일시하는 것과 같다.
파트너 선택
아들러는 누구나 어렸을 때부터 마음속에 이상적인 파트너를 만들어낸다고 말했다.
남성의 경우 어머니가 이상형이며, 어머니와 매우 닮은 여성을 찾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어렸을 때 어머니와 불행한 긴장관계에 놓여 있었다면 어머니와 정반대의 여성을 찾으려고 한다.
물론 사랑의 형태는 다양하기 때문에 아들러도 특별히 어떤 파트너가 바람직한지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다만, '일반적인 의미에서 결혼하기 힘든 파트너'를 선택하는 사람은 겉으로는 결혼을 강하게 바라는 듯 보이더라도 결혼이 현실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다고 파악했다.
여성이 파트너를 선택할 때도 부모의 영향을 당연히 받는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부모가 어떤 사람인지에 따라 파트너를 선택하는 기준이 크게 좌우되지만, 결코 결정적인 영향은 아니다.
대부분의 경우, 결혼 생활이 잘 풀리지 않을때 파트너 선택의 잘못을 부모에게 돌리려는 목적도 있다고 보인다.
남녀는 대등하다
"인간의 분업은 남녀의 분업으로부터 시작되었디."
그리고 이 분업은 '편견이 전혀 없는 기준'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 기준은 사회와 시대에 따라 달라져야 한다.
놓치지 말아야 할 점은 아들러가 결혼이라는 인생의 과제를 직업의 과제와 교제의 과제보다 난이도가 높은 과제라고 생각한 데 주목해야 한다.
남녀가 협력해서 살아간다는 것이 결혼 생활을 원활하게 만들기 위한 중요한 요건이라고 할 수 있다.
결혼을 위한 준비
실패를 거듭하면서 서로의 라이프스타일을 알아내고, 서로가 대등하다고 인식하면서 결혼 생활에서 맞닥뜨리는 문제에 대처해가는 노력을 한다면 결혼이라는 과제를 적절하게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서로 공감할 수 있다면 라이프스타일의 차이는 커다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라이프스타일이 서로 달라야 더 나은 결혼 생활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상대방이 자신과 다른 생각과 느낌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지금까지 몰랐던 새로운 시각을 지닐 기회이며, 이것이 인생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줄 것이다.
남의 과제에 간섭하지 않는다
결혼의 결말이 최종적으로 누구에게 영향을 미치는지, 혹은 누가 최종적으로 결혼의 책임을 지는지 생각한다면 결혼이 결국 누구의 과제인지는 자명하다.
예를 들어 공부는 공부하는 사람 본인의 과제이지, 다른 사람의 과제가 아니다.
결혼도 마찬가지로 결혼하는 당사자 두 사람의 과제이기 때문에 다른 누군가가 반대해도 두 사람이 스스로 결혼에 관해 책임을 질 수밖에 없다.
비록 부모가 반대하더라도 부모의 뜻에 따라서는 안 된다.
일반적으로 행복하게 살아가려면 남의 과제에 일체 간섭해서는 안 된다.
대인관계에서의 갈등은 쓸데없이 남의 과제에 간섭할 때 일어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특별히 부탁을 받지 않는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다.
남의 과제를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다면 먼저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게 없을까?"하고 물어보고, 도움을 사양한다면 그냥 옆에서 지켜보는 게 현명하다.
열등감의 극복
"누군가가 신발을 만든다면 그는 남에게 유용한 사람이다. 사회에 도움이 된다는 감각을 얻을 수 있고, 이런 감각이야말로 열등감을 완화할 수 있다."
사실 모든 일은 꼭 자신이 아니더라도 할 수 있는 사람이 널려 있다.
자신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라는 자부심을 느끼려면 자신이 이 일을 함으로써 남들에게 도움을 준다는 의식을 지니는 것이 중요하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할 수 있다
자신을 과소평가하면 '더 이상 따라갈 수 없다'고 믿어버리게 된다.
그러면 그것이 평생의 고정관념으로 작용해 더는 발전할 수 없게 되고, 늘 제자리걸음만 하게 된다.
그러나 할 수 없다는 고정관념을 버리면 발전할 수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경쟁하지 않는다
아들러는 또한 "다른 사람이 너보다 잘한다고 해도 걱정할 필요 없어"라고 말했다.
경쟁은 다른 사람을 동료로 볼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남들을 동료로 보지 않으면 남들과 협력하고 남들에게 공헌하기가 힘들어진다.
정말로 뛰어난 사람은 자신이 뛰어나다는 사실을 굳이 증명할 필요가 없다.
자명한 사실은 따로 증명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일을 할 때는 노력이 필요 없다
피아니스트든, 공부하는 학생이든, 매일같이 업무에 매진하는 회사원이든, 남들에게 공헌하겠다는 목표가 있다면 힘을 낼 수 있다.
'일'은 영어로 'Calling', 독일어로 'Beruf'라고 하는데, 이는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천직'이라는 뜻이다.
외부에서 강요받거나 남들과 경쟁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아무도 간섭할 수 없는 인간의 내면에서 촉발되었다는 뜻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자신에게 주어진 과제를 수행하면서, 남들에게 어떻게 공헌할 수 있는지만을 생각하는 사람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실패하면 어떤 평가를 받게 될까?'하는 걱정도 하지 않는다.
타인에게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과제가 주어졌을 때 할 수 있는 일부터 조금씩 시작한다.
아들러는 이를 '불완전한 용기, 실패할 용기'라고 불렀다.
실패해도 괜찮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실패를 두려워한 나머지 과제를 아예 수행하지 않는 것보다는 조금씩이라도 과제를 수행하는 것이 중요하다.
경쟁하지 않으려면 기 싸움도 그만두어야 한다.
명령하지 말고 부탁하는 방식으로 자신이 원하는 바를 주장해야 한다.
무언가를 상대방에게 주장하고 관철시키려면 관계를 개선하고 거리를 좁힐 필요가 있다.
분노는 그런 의미에서는 유용하지 않다.
인생의 과제는 스스로 해결할 수밖에 없다.
인생의 과제에 직면했을 때 그 과제에서 도망치지 말고, '내가 해결하겠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책임감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인생이 생각대로 되지 않고 도망치고 싶더라도, 자신의 인생이므로 주어진 인생의 과제를 풀 사람은 자기 자신밖에 없다.
그것이 각자 받아들여야 하는 '책임'이다.
책임은 영어로 'Responsibility'라고 하는데, 이는 '응답하는 능력'이라는 속뜻을 지닌다.
그렇다면 여러 가지 핑계를 내세우며 인생의 과제에서 도망치려 하지 말고 '내가 해결하겠다'고 말하는 응답이 책임을 다하는 자세라고 할 수 있다.
과제를 회피하기 위해 지금의 처지를 남 탓으로 돌리거나 과거의 이런저런 사건 탓으로 돌리는 등 여러 가지 핑계를 내세우지 말고, 자신의 인생에 책임을 가져야만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
물론 누구나 말로는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쉽게 얘기하지만, 정작 실천하기는 쉽지 않다.
많은 사람들의 반대에 직면하더라도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주장에 따르는 책임은 남에게서 비움받을 각오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남들의 평가에 신경 쓰지 않고 미움받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자유롭게 살기 위한 핵심 요소다.
4장
노년의 문제는 능력 쇠퇴 자체에 있지 않다.
아들러는 업무의 가치가 사람의 가치를 평가할 떄 거의 결정적이라고 말했다.
직책의 높고 낮음이 인간으로서의 높고 낮음으로 간주되는 사회에서는 업무를 내려놨을 때 자신에게 더 이상 가치가 없다고 느껴지고, 업무를 떠난 후에는 실의에 빠진 나날을 보내게 된다.
아들러는 이때 노인이 아직도 가치가 있고 사회에 필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아이의 말을 모두 받아주는 온화한 노인이 되거나 매섭고 신랄한 비평가가 된다고 한다.
'자신이 여기에 있어도 괜찮다'는 감각은 사람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인데, 오랫동안 일을 해온 사람에게는 퇴직하고 직장을 떠날 때가 인생의 커다란 위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무소속의 시간이 인간을 인간으로서 소생시키고, 더 크게 성장시키는 시간이라고 생각하는 데까지는 꽤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젊었을 때와는 다른 공헌
아들러가 "중요한 것은 무엇이 주어졌느냐가 아니라, 주어진 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다"라고 말했고, 고대 로마의 철학자 키케로도 이렇게 말했다.
"지금 청년 같은 체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이유는 청년에게 소나 코끼리 같은 힘이 필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현재 보유하고 있는 체력을 잘 사용하면 되는 것이다."
또한 나이가 들면서 지력이 약해지지만, "책을 뇌 근육으로 통째로 씹어먹는 젊은 시절"에 비하면 인생이나 세상에 관한 이해가 오히려 더욱 깊어진다.
특별한 일을 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가치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고 생각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라이프스타일
모든 사람이 노화를 똑같은 방식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아들러는 갱년기가 결코 위기가 아니라고 말한다.
지금까지의 인생에서 젊음과 아름다움으로만 가치를 인정받았던 여성은 갱년기가 되면 "사람의 이목을 끌기가 어렵고, 자신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며, 적의를 갖고 방어적인 태도를 취한다. 언짢은 기분 때문에 우울증이 도지기도 한다."
그러나 모든 여성이 젊음과 아름다움으로만 가치를 인정받지는 않는다.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는 각자의 라이프스타일에 따라 다르다고 아들러는 생각했다.
하지만 아들러는 죽더라도 완전히 소멸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죽음이 어떤 의미인지는 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시간이 없는 해안
병에 걸려 신체적으로 원래 상태로 돌아갈 수 없을지라도 무엇을 배울 수 있을지 생각해보겠다.
첫째, 환자 그리고 가족은 '시간이 없는 해안'에 떠밀려 온 존재다.
"모든 일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움직이지만, 환자는 시간이 없는 해안에 떠밀려온 존재다."
병에 걸리면 내일의 업무 약속을 취소해야 하기 때문에 내일은 오늘의 연장선상에 있지 않다.
당연히 올 것이라고 여겼던 미래가 사라지는 셈이다.
물론 병에 걸리기 전에도 미래가 정말 찾아올지는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건강할 때는 그 사실을 의식하지 않은 채 지낸다.
"인생을 가장 심하게 오해하는 사람은 누구일까? 바로 건강한 사람들이 아닐까?"
'내일이 반드시 찾아올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라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살아가는 데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
병에 걸려 시간이 사라지는 경험을 한 사람은 그 후 시간에 관해 이전과는 다른 견해를 갖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병에 걸렸을 때 배울 수 있는 소중한 지혜다.
일반적인 운동(키네시스)에는 시작점과 끝점이 있다.
그 운동운 효율적이고 신속하게 달성되는 것이 바람직하므로 큰 역에만 정차하는 급행열차와 같다.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이 중요하며, 목적지에 이르기까지의 운동은 목적지에 이르기 전까지 불완전하며 미완성이다.
한편, 에네르게이아는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상태'가 그대로 '이루어진 것'과 같은 운동이다.
이 운동은 시작점과 끝점이 있는 운동(키네시스)과 달리 지금 움직이는 것이 어딘가에 도달했는지에 상관없이 이미 완성되어 있다.
여행도 에네르게이아의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집을 나서는 순간부터 시작되는 것이 여행이기 때문이다.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이라도 목적지로 향하는 과정 하나하나가 모두 여행이라고 할 수 있다.
여행을 할 때는 평상시와 다른 시간이 흐르기 시작한다.
목적지로 가는 시간을 단축하는 이른바 '효율적인 여행'이 결코 중요하지 않다.
그렇다면 삶은 어떤 운동에 속할까?
산다는 것은 시작점과 끝점이 있는 운동이 아니라, 춤을 추는 것 같은 에네르게이아의 운동, 즉 어딘가에 도달한다는 목적이 없는 운동이다.
매 순간 '지금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삶이다.
삶을 에네르게이아로 본다면 사람은 살아가는 동시에 삶을 이루고 있다.
내일이 기다리고 있지 않더라도 인생은 지금 여기에서 완성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점을 깨닫는다면 병에서 회복되지 않더라도 혹은 회복되지 못하더라도 괜찮다고 할 수 있다.
'시간이 없는 해안에 떠밀려온 존재'라는 말은 시간 자체가 사라진다기보다,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시간을 파악하게 된다는 의미라고 이해하면 된다.
'존재' 자체로서의 공헌
보통은 병에서 회복하면 병에 걸렸을 때와 같은 주목을 더 이상 받을 수 없게 된다.
그것이 병에서 회복한다는 일면이다.
그런데 병에 걸리기 전부터 자기중심적으로 모든 일을 파악했던 사람은 병이 나아서 더 이상 각별한 관심을 받지 못하면 실망에 빠진다.
그래서 의학적으로는 아무런 근거가 없는데도 병에 걸린 척 연기를 하기도 한다.
다만 여기에서는 자신이 살아 있는 것 자체에 이미 가치가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이는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 소중한 사람이 병에 걸렸을 때를 생각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면 그 사람이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고맙게 느껴진다.
그리고 병에 걸린 가족이나 친구를 위해 자신이 무언가 힘이 되어줄 수 있는 것 자체가 기쁘다.
고맙다는 말을 듣지 않더라도 자신이 아픈 사람을 위해 어떠한 형태로든 공헌할 수 있다고 느끼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죽음은 삶의 한가운데에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삶의 한가운데에 존재하는 죽음은 죽음 자체가 아니라 오로지 '죽음의 공포'라는 형태로 존재한다.
실제로 죽어보지 않으면 죽음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며 부정적으로 보는 데는 목적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을 알지 못하지만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죽음에 대한 공포를 만들어내는 이유는 인생의 과제에 임하기를 회피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인생의 과제를 해결할 의지가 있다면 죽음이나 질병은 더 이상 두려운 존재가 아니다.
하지만 인간은 반드시 죽음을 맞이한다는 문제는 남는다.
죽음은 그런 의미에서 삶의 일부라고 할 수 있다.
죽어도 무(無)가 되지 않는다고 믿어야만 죽음의 공포를 극복할 수 있다.
개성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자신에 대한 관심을 다른 사람에게도 돌리는 일이 중요하다.
내가 앞으로 어떻게 될까 하는 걱정을 앞세우지 않는다면, 죽은 뒤에 개성이 유지될지를 걱정할 필요도 없다.
"몸이 급속도로 쇠약해지고 마음이 흔들리는 것은 죽으면 완전히 소멸한다는 증거라고 두려워하는 사람이 많다."
아들러는 사람이 죽으면 완전히 소멸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들러는 죽으면 개성이 사라지는지에 관한 문제를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도 않았다.
아들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생의 마지막 시험은 나이 들어 죽는 것에 대한 공포다. 다음 세대를 보면서 문화의 발전에 공헌했다고 의식함으로써 자신의 내세를 확신하는 사람은 나이 들어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시간은 유한하고 인생의 마지막에는 반드시 죽음이 찾아오지만, 공동체에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에게 내세를 약속하는 것은 전체의 행복에 공헌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전체의 행복에 공헌하는 예로서 '어린이'와 '일'을 들 수 있다.
형태는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세상에 무언가를 남김으로써 후세에 공헌할 수 있다면 의미가 있다.
이때 나 자신이 죽어서도 남을 수 있느냐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나는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실제로 나무를 심겠다는 의미가 아니다.
자기 자신이 성과를 보지 못할지언정 후세에 무언가를 남기겠다는 것이 영원히 살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라는 뜻이다.
꼭 형태가 있는 물건을 남길 필요는 없다.
어떤 사람이 살았다는 사실은 꼭 형태가 있는 물건이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누구나 후세에 전달할 수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 인간이라면 누구나 후세에 남겨줄 수 있는 유산이 있다. 이 유산은 이익만 있고 손해는 없다. 그것은 바로 용감하고 고상한 생애다."
유산을 남긴다면 개성이 사라지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주목해야 할 것은 사람 자체가 아니라 그 사람의 말이다.
몇십 년 전에 사망한 사람의 말이라도 누군가의 마음 속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면, 그 사람은 영원히 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잘 산다'
결국 죽음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앞으로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죽음이 어떤 것이냐에 따라 지금의 삶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살아가는 한, 죽음이 어떤 것이든 상관없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고민하는 것이 죽음에 관해 생각하는 하나의 길이다.
죽음이 어떤 것인지도 모르는 데다 앞으로 얼마나 더 살지도 스스로 결정할 수 없다면, 그런 문제에 관해 머리를 싸매고 고민할 필요가 없다.
아들러는 "그저 사는 데만 급급해서 힘들어하는 사람이 너무나 많다."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오래 사는 데만 신경 쓰지 말고, 주어진 삶 속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기 위해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 주어졌느냐가 아니라, 주어진 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다."
이 말은 삶의 문제 전반에 적용할 수 있다.
주어진 삶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플라톤의 말을 빌리면 앞으로 살아갈 시간을 그냥 보내지 말고, '잘 살기' 위해 사용해야 한다.
아들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생은 유한하지만,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데는 충분히 길다."
이처럼 중요한 것은 '잘 사는' 일이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은 아들러의 말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내가 가치 있다고 생각될 때는 나의 가치가 공동체에 유익할 때뿐이다."
내가 남에게 도움이 된다고 느껴야 그런 자신을 좋아할 수 있게 되고, 비로소 삶의 가치를 얻을 수 있다.
이를 위해 남들과 관련을 맺으려면 대인관계를 주된 내용으로 하는 인생의 과제를 회피해서는 안 된다.
만족스러운 연애관계를 맺은 사람은 그 사랑이 영원할지 미리 걱정하지 않는다.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을 만큼 알찬 사랑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장래를 추호도 고민할 필요가 없을 만큼 충실한 연애를 한다면 그 연애는 분명히 성취될 것이다.
인생도 이와 마찬가지가 아닐까?
잘 사는 데만 전념한다면 앞으로의 일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
5장
지금 이 순간이 리허설이 아닌 '진짜 인생'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인생을 미루지 않는 것은 행복해지기 위해 사소하지만 매우 중요한 마음가짐이다.
무엇이 좋은 기회인지 알아차리기는 쉽지 않다.
한편,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며 사는 동시에 '영원한 시간이 있는 것처럼' 일에 몰두할 필요도 있다.
철학자인 모리 아리마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황해서는 안 된다. 릴케가 말했듯이 앞으로 무한한 시간이 있다고 생각하고 침착해야 한다. 그래야 양질의 일을 낳을 수 있다."
아들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신감을 갖고 인생의 과제와 대결하려는 사람은 초조해하지 않는다."
이중의 삶
이처럼 앞을 응시하는 동시에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는 이중의 삶이 요구된다.
즉, 현실이 어떻든 간에 '이상을 잃지 않는 것'과 '지금 이 순간을 사는 것'을 양립시켜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상은 현실이 아니기 때문에 이상인 것이다.
앞을 응시해야만 지금 눈앞에 일어나는 사건에 동요하지 않고,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할 수 있다.
어떤 사건을 마주하더라도 그 사건은 인생의 커다란 에피소드이기는 하지만 치명적이지는 않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인생에서는 분명히 길을 잃고 헤매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그 이상을 '길잡이 별'로 삼는다면 금세 길을 찾을 수 있다.
그렇다면 인생에서 만나는 모든 사건이 이상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에서 일어나는 셈이 되고, 일시적으로 쓰러질지언정 절망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 점을 이해한다면 매 순간에 발목을 잡히지 않고 또다른 일을 시작할 수 있다.
최종적으로 달성해야 할 이상이야말로 궁극적인 목표이자 행복이다.
목표에 초점 맞추기
궁극적인 목표에 초점을 맞춘다면 늘 하나의 길만 고집하지 않고, 필요하다면 다른 길을 선택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때까지 들인 시간과 노력과 돈이 너무 많으면 길을 바꾸는 데 큰 용기가 필요하다.
물론 다른 길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항상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다른 길로 나아가겠다고 생각했을 때, 목표에 확실히 초점을 맞춰두었다면 지금 어떤 일이 일어나도 사소한 것들에 흔들리지 않고, 최종 목적지를 응시할 수 있다.
쓸데없는 일을 하지도 않고, 길을 돌아가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목적지에 도착하기만 하면 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창밖의 풍경을 즐기는 여유도 필요하다.
아들러는 이 세상이 장밋빛이라는 것도, 반대로 세상을 비관적인 말로 묘사하는 것에도 반대했다.
"지구상에서 유유자적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인생의 쾌적함뿐 아니라 불쾌함까지 자신에게 속한 것이라고 확신한다."
인생에는 쾌적함뿐 아니라 불쾌함도 존재하는데, 아들러는 '지구상에서 유유자적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그 사실을 확신한다고 말한다.
'지구상에서 유유자적하며 살아간다'라는 표현은 아들러가 즐겨 사용했는데, 이와 반대되는 표현은 '적진 한가운데 떨어졌다'이다.
"분명히 이 세상에는 악, 어려움, 편견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 세상이며, 이로운 점이나 불리한 점이나 모두 우리의 몫이다."
그래도 살아 있을 가치는 있다.
살아 있을 가치가 있다고 말하려면 이 세상에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자신이 처한 현실에서 눈을 돌리지 말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해나가야 한다.
아들러는 이로운 점과 불리한 점이 동시에 존재하는 이 세상에서 겁내지 말고 자신의 과제에 적절한 방법으로 과제와 맞서는 것이 "세상을 개선하는 데 자신이 해야 할 역할이다"라고 말했다.
인생의 마지막 날을 기다리지 말고, 또한 내일을 오늘의 연장선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오늘 하루를 만족스럽게 산다면 지금 이곳에서 행복해질 수 있다.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자기 나름대로의 개인적인 행복을 추구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더 나아가 자기 혼자만 행복해져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어쩌면 자기 혼자만 행복해지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사람은 남들과의 관계를 떠나 살 수 없으며 다른 사람과 공생할 필요가 있다.
서로 협력하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사는 것이다.
일방적으로 주는 것이 아니라, 남들에게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과 사람은 상호 의존적인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은 이런 상호 의존적 관계에서 다른 사람에게서 받기만 하지 않고, 남들에게 공헌할 수도 있다.
이때 남들에 대한 공헌은 행위 차원의 공헌뿐 아니라, 존재 차원의 공헌도 가능하다.
어떤 식으로든 남들에게 공헌하고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고 느낄 때, 사람은 행복해질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행복은 인생의 끝을 기다리지 않아도 충분히 얻을 수 있다.
놀이도 인생의 과제
인생은 괴로움의 연속이 아니다.
즐거운 놀이도 인생의 중요한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업무가 생산적이라면, 놀이는 비생산적이다.
그러나 생산적이기 때문에 가치가 있고, 비생산적이기 때문에 가치가 없다고 할 수는 없다.
즐겁게 놀 수 있는 사람만이 다른 인생의 과제도 즐겁게 해낼 수 있다.
사실 노는 데 서투른 나는 놀이가 중요하다는 설명을 하기에 적합한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
에네르게이아로서의 삶은 분명히 매 순간이 소중하지만, 그렇게 살기 위해 늘 숨이 막힐 정도의 긴장 상태에 있을 필요는 없다.
구약성경 <전도서>에는 인생의 모든 일에는 다 때가 있다고 한다.
태어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고,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다.
그리고 이어서 다음과 같은 말이 쓰여 있다.
"이제 나는 깨닫는다. 기쁘게 사는 것, 살면서 좋은 일을 하는 것, 사람에게 이보다 더 좋은 것이 무엇이랴."
결국 자신이 하기 나름
다른 사람이 인생의 과제에 맞서도록 도와주는 일을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용기 부여'라고 말한다.
그 사람의 장점이나 남들에게 공헌해준 사실을 칭찬하는 방식으로 용기를 부여해줄 수 있지만, 당사자가 인생의 과제에 맞서지 않으려고 하면 그 누구도 그 사람을 도와줄 수 없다.
카운슬링은 카운슬러와 내담자가 지도를 보면서 함께 여행을 다니는 것과 같다.
어느 정도까지는 함께 갈 수 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내담자가 홀로 가야 한다.
그 뒤로 카운슬러는 도와줄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
카운슬링을 꼭 받지 않더라도, 지금 자신의 모습을 조금씩이라도 바꾸겠다고 결심한 사람은 그 순간부터 이미 변화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삶의 자세가 달라지면 당연히 수반되는 변화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