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멘토 붓다>
"극악한 죄를 지었으나 참으로 뉘우치면 죄가 소멸한다."
"날로 뉘우쳐 그치지 않으면 죄의 뿌리를 뽑을 수 있다."
불교에서는 이처럼 우리의 마음을 중시하기 때문에 아무리 큰 죄를 지었어도 진심으로 참회를 하면 그 죄의 뿌리를 뽑고 구제받을 수 있다.
사람들은 죄를 지으면 자포자기하여 더 많은 죄를 짓는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아무리 큰 죄를 지었어도 잘못을 참회하고 죄과를 달게 받겠다는 마음을 먹으면 다시는 더 죄를 짓지 않게 되고 새롭게 태어날 수가 있다고 한다.
붓다의 가르침에 의하면, 우리는 순간순간 육도윤회를 한다.
내 마음이 자비로 가득 차 있으면 극락정토, 누군가를 증오하고 싸우려 든다면 그 순간이 곧 아수라의 세계이고,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괴로우면 그곳이 지옥이다.
우리는 끝까지 늘 자신의 허물을 살피고 참회함으로써 순간순간 새롭게 태어날 수 있다.
우리의 마음을 어떻게 향하느냐에 따라서 늘 극락에 살 수도 있고 지옥에 살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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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를 섬으로 하고 법을 섬으로 하라."
자기를 등불로 삼고 법을 등불로 삼으라는 유명한 말씀이다.
"자귀의, 법귀의"
스스로에게 의지하고 붓다께서 다르쳐 주신 진리에 의지하라는 것이다.
붓다께서는 다른 종교의 창시자나 지도자들이 흔히 저지르는 자신의 신격화 같은 어리석음과는 근본적으로 거리가 먼 분이었기 때문에 무조건 믿고 따르라는 식의 가르침은 내리지 않으셨다.
대신에 언제나 스스로를 살피고 진리에 비추어 나아가라고 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는 쉬우면서도 어렵다.
다른 것에 의지하여 무조건 믿으면 마음이 편하고 든든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믿는 것의 허구성이 발견될 때는 더 깊은 절망감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언제나 깨어 있으면서 자신의 마음을 살피고 진리에 의거하여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두려움도 슬픔도 괴로움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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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께서는 담담하게 이를 받아들이셨다.
과거의 업력에 의한 과보는 피하기 어려우며 모든 것은 무상하며 변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치를 거스르려고 할때에 괴로움이 생기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어느 것 하나, 어느 한 사람이라도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이것은 진리이다. 비구들이여, 큰 나무에서는 많은 가지 중에서 먼저 잎이 지는 가지도 있을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그들 두 사람은 먼저 갔다. 이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나는 그대들에게 이르노라. 스스로를 섬으로 하고 스스로를 의지하되 다른 것을 의지해서는 안 된다. 법을 섬으로 하고 법을 의지하되 다른 것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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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사람들이 둥지를 엮는 동안
깊은 곳에 다리를 만들어서
흐름을 잘 건넌 사람이야말로
잘 건넌 자, 지혜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
무명으로 인하여 괴로움으로 가득 찬 현실을 이 언덕, 즉 차안이라고 하고 그것을 벗어버린 열반의 세계를 저 언덕, 즉 피안이라고 비유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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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경'은 법을 바르게 알기 위한 거울로서 이 거울에 비추어 보면 사후의 운명에 대해 알 수 있다고 한다.
불, 법, 승의 삼보와 성스러운 계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과 귀의를 통하여 자기가 태언라 곳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 판단의 표준은 다음과 같다.
첫째, 붓다는 최고의 인격자이며 위없는 인천의 스승이라고 절대적으로 믿는 것
둘째, 법은 보편타당성이 있는 진리이며 사람들을 열반이라는 이상에 이르게 하는 최상의 가르침이라는 것을 절대적으로 믿는 것
셋째, 승가는 수행을 쌓아 존경을 받아 마땅한 붓다의 제자들의 모임으로서 중생을 이끌고 지도한다는 것을 절대적으로 믿는 것
넷째, 삼보를 바르게 이해하고 절대적으로 믿는 것에 더하여 살생과 투도, 거짓말, 사음 등을 하지 않는 성계를 지키는 것
이러한 네 가지를 잘 지키면 죽어서 나쁜 곳에 태어나지 않고 수다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미리 알 수 있다는 말씀이다.
수다원은 성자의 무리에 들어갈 수 있는 초보 단계의 꺠달음이라고 할 수 있다.
수다원 다음에는 사다함, 아나함을 거쳐서 드디어 아라한에 이르게 된다.
붓다께서는 이렇게 삼보에 귀의하고 성계를 잘 지키면 거기에 비추어 자기가 사후에 어떻게 될지를 알 수 있다고 하셨으며, 이것을 법의 거울, 즉, 법경이라고 하셨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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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가르침에 비밀스러운 것은 없었다.
어떤 사람에게는 가르쳐주고 다른 사람에게는 가르쳐주지 않는 법도 없고, 활짝 열어놓으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경전에서는 붓다의 가르침을 '현실적으로 증명되는 것, 때를 격하지 않고 과보가 있는 것, 눈 있는 자는 와서 보라고 말할 수 있는 것, 능히 열반으로 인도하는 것, 또 지혜 있는 자가 각기 스스로 알 수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붓다께서 설하신 법은 하늘나라의 일이나 사후 세계의 일이 아니었다.
우리 인생과 직결되는 현실 문제에 대한 것이었다.
붓다께서 말씀하신 연기의 이치나 사성제의 도리는 너무나 명백하여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것이다.
붓다께서는 천상의 일이 아니라 지상의 일을 말씀하셨으며, 내세의 운명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현실에서의 인간의 문제를 말씀하셨다.
미래의 일을 말씀하셔도 그것은 현재에 바탕을 두고서 그 결과를 예견하신 것으로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는 이치를 말씀하신 것이다.
각자의 인생을 잘 살펴보면 다 스스로 만든 것임을 알 수 있다.
굳이 전생까지 들먹일 필요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붓다꼐서 말씀하신 진리는 '때를 격하지 않고 과보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한문으로는 '즉시적, 현생적'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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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께서는 우리의 마음에 떠오르는 것을 그대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을 현생적이라고 하셨다.
만약 누군가가 사후 세계나 천국에 대한 이야기, 혹은 신의 계시에 대한 것을 말했다면 그것이 실현될 때까지는 믿을 수가 없다.
죽은 다음 심판을 받는지 어떤지, 혹은 말세가 올 것인지 아닌지는 그때 가봐야 알 수 있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보지도 않은 신을 믿으면서 신의 나라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러나 붓다의 말씀은 우리의 마음을 어떻게 향상시키느냐에 대한 것으로 자기의 마음을 잘 관찰하면 누구나 바로 알 수 있는 것이다.
'눈 있는 자는 와서 볼수 있는 것이고, 지혜 있는 자는 스스로 알 수 있는 것'이다.
사후 세계가 아니라 지금 바로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관찰하여 다스림으로써 열반을 얻을 수가 있다.
예를 들어, 지금 자기가 누구를 미워하고 있는 경우 그 미움의 실체를 파악하여 그것이 쓸데없다는 것을 깨닫고 미워하는 마음을 버려버린다면 그 순간 마음이 평화로워지며 그만큼 열반이 얻어진다.
또 다른 예를 들어 보자.
어떤 물건을 보고 욕심을 냈다가 욕심이 하잘 것 없다는 것을 깨닫고 욕심을 버린다.
그 순간 마음의 평화가 찾아온다.
그것이 곧 해탈이다.
이처럼 붓다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 자신의 마음을 잘 살피면 괴로움의 원인이 밝혀지고 그 원인을 제거하면 괴로움을 벗어나 열반이 얻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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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께서는 육신의 무상함을 이미 알고 계셨고, 생겨난 것은 모두 멸한다는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 이미 반열반을 예감하고 계셨던 것이다.
반열반은 완전한 열반에 든다는 의미로서 육신이 있는 한 업의 소멸이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므로 육신이 멸했을 때 완전한 열반에 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붓다께서 가르치신 본래의 뜻은 반드시 죽어야만 열반을 얻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모든 집착을 벗어버리고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되면 그것이 곧 열반이다.
그렇기 때문에 붓다께서는 당신의 무상한 육신에 예배하지 말고 스스로를 의지하고 진리를 의지하라고 가르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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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를 의지처로 하고 법을 의지처로 한다는 말씀은 우리가 불교를 공부하는 데에 있어서 가져야 할 기본 태도를 말씀하신 것이다.
스스로의 마음을 잘 살펴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을 찾고 진리에 의지해야 하며, 어떠한 편견이나 관습, 혹은 권위가 있다 하여 무조건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붓다께서 성도하시고 가장 먼저 인식하신 것은 연기법이었다.
이 우주는 어떤 초월자가 만들고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의존하여 생성하고 관계를 맺는 상대적인 세계라는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불교에서는 바깥에 의존하 만한 절대적인 신이 없다고 한다.
오직 자기 자신과 진리만이 의지처가 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고 진리인 법을 등불로 삼아야지 어떤 절대자나 한 개인의 숭배에서 열반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자기의 마음을 잘 살펴 현재의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는 것이 불교의 근본정신이다.
그것은 지혜를 개발하는 것이다.
탐, 진, 치의 어리석음을 지혜를 통해서 벗어남으로써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것이 해탈이고 열반이다.
불교는 붓다의 말씀을 의지처로 삼고 오직 자신의 마음에 비추어 길을 열어간다.
진리를 의지처로 삼고 따라가면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것은 이 세상 모든 종교와 다른 불교의 특색이기도 하다.
"자신이 의지할 곳은 자신 뿐이다.
다른 어떤 것에도 의지할 곳은 없다.
그러므로 자기가 잘 제어되었을 때
그는 얻기 어려운 의지처를 얻은 것이다."
불교의 수행은 신에게 구원받고자 하는 것도 아니고 신의 은총으로 하늘나라에 태어나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오직 철저한 자기 성찰로 괴로움의 원인을 파악하고 그것을 없애 절대적 자유와 평안을 누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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