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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식이라는 가설

Alice12 2024. 1. 11.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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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성이란 환자가 무의식에 억눌린 채로 잊힌 것들을 다시금 떠올려 말해 내기 위한 준비 작업이었다.

이 작업은 분석가에게 치료를 위해 필요한 단계다.

 

실제로 '말'이라는 행위를 통해 분석 실천의 주도권을 쥐는 것은 분석가가 아니라 환자다.

환자의 무의식이야말로 분석 과정에서 진정한 '주체'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구성'이 옳은지 그른지에 대한 판단이 지연된 채로 분석 작업이 진행된다는 점은 구성의 특징이다.

해답은 분석 중에 지속적이고 자연스럽게 밝혀진다.

 

무의식이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자명한, 관찰 가능한 대상으로 존재하지는 않는다.

무의식이 먼저 있고 그것을 전제로 해서 분석이 시작되는 것은 아니다.

분석이 시작되는 시점에서 무의식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가설로 머무른다.

분석 과정이 시작되면서 무의식은 모습을 드러낸다.

요컨대 무의식은 정신분석의 실천에서 떨어질 수 없다.

 

프로이트는 자신의 임상 경험에서 무의식의 존재를 확신했겠지만, 그가 그것을 어디까지나 '가정'이라 부른 점에 주목할 가치가 있다.

여기에서 프로이트가 논의를 진행하는 방식은 이른바 '간접 증명'이다.

즉, 무의식이라는 것이 없다면 설명할 수 없는 사례를 보임으로써 간접적으로 무의식의 존재를 증명하는 식이다.

누구에게나 일상적으로 일어나지만 그것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확실하지 않은 착상이나 어떠한 흐름에서 온 것인가 알 수 없는 생각 등이 이러한 사례에 해당한다.

 

우리는 오로지 의식을 경유해서만 자신의 마음이 움직이고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리하여 무의식이라 하더라도 의식이라는 우회로를 통해서야 비로소 경험된다.

자신의 의식이 뚜렷하고 직접적으로 실감할 수 있는 데 비해 무의식은 어디까지나 간접적이면서 애매함 또한 뒤따른다.

달리 말해, 그렇기에 우리는 일부러 분석가를 찾아와 '말하는' 행위를 반복하면서 그제야 자신의 무의식과 만나게 된다.

 

무의식은 추론에서 이끌려 나오는 '가정'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우리가 평소에 이러한 종류의 '가정'에 따라 살아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자신의 무의식과 마주하는 데에는 거의 타자의 의식과 마주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태도가 요구된다.

우리는 타자의 의식을 직접 경험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타자 또한 의식을 지니고 있음을 마치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인다.

이는 우리가 타자의 표정이나 행동에서 자신과 비슷한 모습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요약하자면 프로이트는 타자의 의식이라는 가정과 동일한 정도로 무의식이라는 가정도 유효하면서 필연적이라고 보고 있다.

 

 

출처: <라캉과 철학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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