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사적인 관계를 위한 다정한 철학책> 3
또 다른 삶이 반드시 죽음 이후에만 주어지는 건 아니다.
부활은 살아생전에도 일어날 수 있다.
죽음을 전제하지 않는 부활, 죽은 적이 없지만 살아나는 것.
이것은 기독교적 관념이다.
기독교는 지금의 삶 안에서의 거듭남을 강조하는 종교이기도 하다.
거듭난다는 것은 다시 태어난다는 뜻이다.
온 마음을 다해 신을 믿으면, 이후의 삶은 그 이전의 삶과 질적으로 구별된다.
마치 또 다른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과 같다.
생물학적 차원에선 이전과 다를 게 없지만, 영적인 차원에선 그 삶은 완전히 새로워진다.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사랑을 통해 새 삶을 사는 방법이다.
우리는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존재다.
'나'는 객관적 사실들의 총합을 넘어선다.
인간은 매 순간 거듭난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인간은 매 순간 새롭게 거듭날 가능성을 품은 존재다.
반드시 대단한 변화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저 나의 존재는 매 순간 변화하고 있으며, 때로 더 급진적인 변화를 펼칠 가능성도 품고 있다는 사실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그런 인식만으로도 우리는 사지가 마비된 듯한 정체에서 벗어날 수 있다.
실제로 인간은 얼마든지 다시 태어나 새 삶을 살 수 있다.
사랑 역시 인간을 다시 태어나게 한다.
사랑은 때로 우리 존재를 급진적으로 변화시킨다.
사랑하는 사람은 이전과 다른 사람이 된다.
깊은 사랑을 체험한 사람은 때때로 표정, 말투, 사고방식, 가치관까지 아주 많은 것이 바뀐다.
사랑은 왜 인간을 변화시킬까?
그건 바로 사랑을 통해 자기중심성의 종말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사랑을 하는 사람은 존재의 중심이 내 바깥에 있다고 느낀다.
사랑하는 이와의 관계가 내 존재를 이루는 핵심 축이 된다.
이런 점에서 사랑은 죽음과 아주 비슷하다.
사랑은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이탈을 전제로 한다.
사랑은 행복한 만큼 두려운 경험이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이러다가는 자기 자신을 잃어버릴지도 모르겠다는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사랑은 존재의 상실로만 끝나지 않는다.
동시에 새로운 내가 탄생하는 경험이기도 하다.
사랑을 통해 우리는 새롭게 태어난다.
이전에 내 안에만 머물러 있었던 나의 존재는 사라진다.
그리고 사랑의 대상 안에서 새로운 내가 탄생한다.
사랑 안에서 죽음과 탄생을 경험한 사람은, 상대방도 나에게 사랑으로 화답할 때 또 다른 확신을 얻는다.
그 사람과의 관계 안에서 내 존재를 펼쳐나갈 수 있다는 믿음을 통해, 나는 내가 되살아났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강력하게 경험한다.
한 번 죽지만 두 번 살아나는 것, 존재의 상실을 경험하지만 그럼으로써 더 강력한 존재의 확신을 얻는 것.
사랑 안에서의 부활은 우리의 유한한 삶 안에서 직접 일어난다.
사랑은 메시아가 강림한 종교다.
죽음 없이도 펼쳐지는 사후세계다.
사랑은 단지 예언에 머무르지 않고 실현한다.
저주는 사랑의 힘으로 극복된다.
사랑을 통해 생명을 되찾고, 상대방과의 관계 속에서 새로운 삶을 얻는다.
신이 인간을 창조하는 신화의 반복이 아닌, 스스로 자신의 창조에 참여하는 새로운 인간 유형의 이야기다.
사랑은 생명체가 죽음, 온갖 고통과 지루함, 부조리가 가득한 현실이 아닌 생명의 방향으로 향하도록 만드는 유일한 힘이다.
사랑은 인간의 존재 자체를 변화시킴으로써 부활을 체험하게 한다.
사랑을 통해 나는 생물학적인 죽음에 저항하는, 존재의 거듭남을 경험한다.
밤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낮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듯이, 죽어보지 않은 사람은 사는 게 무슨 의미인지 이해할 수 없다.
사랑은 자기중심적인 내가 죽는 경험이다.
그리고 상대와의 관계 속에서 새롭게 살아나는 경험이다.
동화가 행복한 결말에 이르기 위해서는 죽음의 위기가 극복되어야 한다.
동화에서도 현실에서도 죽음의 위기는 언제나 사랑을 통해 극복된다.
사랑은 생명이 죽음을 극복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게 해준다.
...
사랑하는 사람의 존재가 끝을 향해 달려간다는 것을 생생하게 느낄 때, 우리가 남들의 기준에 얼마나 합치하는지는 부차적인 문제가 된다.
남들이 뭐라고 하건 우리에게 주어진 고유의 가능성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그 가능성을 실현하는 일이 훨씬 더 중요해진다.
반드시 특별한 일을 해야 우리의 고유한 가능성이 실현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오히려 특별한 일을 하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할 필요가 있다.
남들이 좋다고 생각하는 것, 남들이 특별하다고 여기는 것을 좇아 사회의 입맛에 맞는 방향으로 우리의 모습을 끌고 가는 게 아니라, 진정으로 우리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자유롭게 창조적인 주체로서 우리가 실현할 수 있는 모습이 무엇인지 고민해야 한다.
어쩌면 아무것도 바꾸지 않고 지금의 모습 그대로 사는 게 우리의 고유한 가능성을 실현하는 일이 될 수도 있다.
혹은 평범한 일상에서 벗어나 완전히 새로운 여정을 그려나가는 것이 더 가치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전까지 우리에 대한 내 인식은 사회적인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사회가 정한 기준을 적당히 지키며 사는 것은 분명 행복으로 이르는 안전한 길이다.
하지만 이제 나는 안다.
그것이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라는 사실을.
그래서 나는 다른 선택을 하게 될 날이 오면, 기꺼이 삶의 방향성을 급진적으로 변화시킬 것이다.
우리를 위해서.
...
우리는 존재라는 임무를 부여받은 채, 이 세상에 나와서 삶이라는 여정을 이끌어가는 중이다.
실존의 핵심 조건은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의식하는 것이다.
존재한다고 해서 반드시 실존한다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존재한다는 의식이 없으면 자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도 관여할 수 없다.
나에게 일어나는 일들은 나와 상관없는 게 아니라, 내가 겪는 일들이다.
나는 하나의 주체로서 내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통합해서 사건의 흐름을 만든다.
나는 실존자로서 의식을 가진 채 이 세상에 존재한다.
고유의 의지를 가진 채 세상에 자신의 행적을 그려 나간다.
모든 실존자는 각자 나름의 상황에 놓여 있다.
상황은 이미 주어진 조건이다.
상황은 언제나 나의 의지와 상관없는 조건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그런데 실존자의 삶은 상황에 영향을 받을지언정 상황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되지는 않는다.
실존자는 주체적인 결정의 순간들을 마주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그 순간에 무엇을 선택하는지에 따라 삶이 달라진다.
실존적 결정은 경향성을 넘어선다.
특정한 경향성을 가진 사람이 특정한 상황에서 어떤 결정을 내릴지 확률적으로 예측할 수도 있다.
하지만 확률은 확률일 뿐이다.
유형화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나 자신을 잃어버리도록 만든다.
나와 주변 사람들을 유형화해서 파악하련느 습관은 존재를 직접 마주하는 능력을 감퇴시킨다.
분명 유형화는 대상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편리한 매개물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대상 자체가 아니다.
인간은 유형이 정의하는 바를 훨씬 넘어선다.
우리는 보편적인 규정을 통해서는 파악될 수 없는 개별자로서의 인간을 마주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