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본 후에 다스리는 마음> 5
명상을 할 때 우리는 몸에 주의를 기울인다.
그리고 우리 몸이 어떤 굳어진 실체가 아니라 변화하는 속성을 지녔음을 알게 된다.
우리는 통일되고 안정된 유기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존재며, 그 속에서 다양한 감각을 발견한다.
우리 몸이 하나의 블록으로 구성되었다는 확신은 사라지고, 분해되고 이동하는 유동적 조합의 결과라는 느낌을 받는다.
하나씩 해체되는 퍼즐 조각처럼.
이것이 바로 육체적 깨달음이다.
이어서 정신적 깨달음이 찾아온다.
명상 수련은 정체성에 대한 우리의 서사를 가위로 싹둑싹둑 잘라 낸다.
주의가 정확히 생각에 가 있을 때, 우리는 스스로 생각의 조각들을 이어 이야기를 만들어 내고 있음을 똑똑히 목격한다.
그리고 나면 편집점, 즉 잘라 내야 할 지점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우리는 이제 퍼즐을 맞추는 사람이 아니라 허무는 사람이다.
정체성을 떼어 버리고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에 여백을 마련한다.
이렇게 명상적 탐구의 순간에 도달했을 때, 정체성에는 더 이상 한계도, 경계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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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은 병적인 분열의 경험이 아니라 우리 주변의 모든 것과 다시 결합되는 경험이다.
우리는 우주의 일부이자 전체이므로, 그리고 우리를 구성하고 물질을 구성하는 공(空)은 사물의 본질이므로, 공은 더 이상 두려운 허무가 아니다.
그것은 세상 모든 것을 연결해 주는 거대한 심장이다.
이제부터 우리는 행복을 더 이상 밖에서 찾지 않는다.
바깥은 이미 우리 안에 있다.
타인에게서도 찾지 않는다.
타인은 이미 우리의 일부이다.
편협한 정체성의 속박에서 벗어날수록 고독이라는 착각이 무너져 내린다.
그리고 나 자신이 그동안 알던 것보다 더 넓은 정체성에 속해 있다는 깨달음과 함께 깊은 안도감이 우리를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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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의 길은 우리가 가진 성격과 인격을 있는 그대로 오롯이 받아들이게 한다.
누구도 우리의 고유성을 판단하거나 억압할 수 없다.
명상은 이 사실을 인식하고 인정하게 해 준다.
명상에서도 정체성의 심리적 차원은 전적으로 반영된다.
하지만 우리 마음의 서사가 만든 정체성, 생각들이 고통의 근원이 될 때는, 우리가 하는 경험이란 게 사실은 얼마나 몰개성적인가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로써 우리는 마음의 서사를 상대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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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우리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현재만을 살아간다.
현재에서 벗어나는 것부터가 우리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과거나 미래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이라면, 우리가 실제로 살 수 있는 건 지금 이 순간이 유일하다.
'현재 속에서 사는 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명상은 지나가는 시간의 현실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순간적으로나마 관념적 껍데기를 벗어던지고, 바로 지금, 여기와 만날 수 있게 해 준다.
우리는 시간에서 더 이상 억압도, 한계도 느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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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은 스스로를 증명하려고 크게 소리칠 필요가 없다.
모든 게 이미 거기 있기 때문이다.
다만 살아 있는 현상들이 지닌 아름다움을 드러낼 수 있을 정도의 존재감과 느림을 건네는 접근 방식은 명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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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하려고 애쓰지도, 분석하지도 말라. 자연을 보듯 자신을 보라." - 페르난두 페소아
명상가들이 그렇듯, 정물화가들은 판단도 분석도 이유도 부여하지 않고 다만 존재할 뿐이다.
사물 자체, 사물이 표현하고 있는 것보다는 사물에 본질적으로 내재된 힘에 관심을 기울였다.
이들은 사물의 겉모습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삶의 비밀을 수집하고자 했다.
주의 깊게 바라보기, 다만 현실을 주의 깊게 보는 것만으로 충분함, 어떤 생각이나 특정 이론 반영하지 않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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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년 동안 칩거 명상을 경험하고 나서야 지금의 나는 내 일상의 중심이야말로 진정한 수련 공간이라는 느낌을 종종 받곤 한다.
가장 일상적이면서 반복적인 동작들이 이루어지는 공간.
집은 내가 느끼는 좌절, 기대, 불만족도를 완벽하게 측정할 수 있는 장소다.
내가 쌓아 온 명상 수련을 되짚어 보고 평가하는 데 더할 나위 없이 이상적인 장소.
우리가 있는 바로 이곳에 집중하는 능력, 일상을 만족의 길로 만드는 재능.
하찮은 것을 포함하여 각각의 디테일에서 경이의 원천을 발견하고, 모든 상황에서 사랑과 배려가 담긴 무조건적 기회를 발견하는 만족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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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민은 인간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일본인들은 살아 있는 모든 것과의 다정한 다공성의 상태를 설명하기 위해 '모노노아와레' 또는 '경이로운 세계에 대한 공감' 개념을 만들었다.
식물이든, 광물이든, 동물이든, 인간이든, 세상 모든 것은 전부 같은 방식으로 사랑받고 보호받을 자격이 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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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명상에서는 아무것도 거부하거나 금지하지 말고 모든 게 마음에서 자라나도록, 존재하도록 가만히 내버려 두라고 가르친다.
극도로 이기적이거나 공격적인 생각조차 억제의 대상은 아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것을 기꺼이 맞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것은 정신과 마음속에서 자라나는 것이므로 충분히 인정해야 한다.
명상을 할 때 정신세계는 원시의 정원, 급진적인 허용의 공간, 일종의 의식의 버닝맨으로도 묘사될 수 있다.
그 어떤 것도 판단하거나 억압할 수 없다.
우리의 생각은 이제 더 이상 좋거나 나쁜, 아름답거나 추한, 가치 있거나 가치 없는 등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명상은 도덕적 판단의 초대가 아니다.
그보다는 우리의 생각을 의식의 자연스러운 표현으로 바라보게끔 이끈다.
생각의 내용이 아닌 생각 그 자체에 관심을 기울이라는 게 오랜 지침이다.
연민은 바로 거기에 있다.
의식 속에서 몸을 일으키는 모든 것에 대해 판단을 내리는 대신 있는 그대로 기꺼이 맞아들이고, 나의 생각을 절대 진실로 간주하지 않는 명상가의 능력 속.
연민은 바로 이런 곳에서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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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를 발견하고 거기서 다른 세상을 여는 것.
불완전하고 서글픈 우리의 약점들 너머로 빛이 오솔길을 열 수 있게 하는 것.
결국 우리의 나약한 모습 속에 비밀스럽게 간직된 소중한 자산을 빼앗기지 않고, 분명히 아름다운 어떤 것을 지닌 우리 스스로에게 등돌리지 않기 위해, 명상은 자신의 나약한 모습과도 최대한 친하게 지내 보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한때는 고통, 치욕, 죄의식의 근원이었던 것들이 받아들여지고 변화되며, 나아가 금이 갔기 때문에 더 아름다워질 수 있도록, 인류에게 유용한 존재가 될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