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에 읽는 융 심리학 2
6장
나는 모든 결혼생활에 대해 이런 질문을 기꺼이 던지곤 했다.
'이 사람들은 이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서로 성장하고 있는가, 서로를 유치한 존재로 만들고 있는가? 이 관계가 그들을 더 큰 자기로 나아가게 하는가?'
얼마나 많은 영혼이 결혼생활에서 죽었고, 또 얼마나 많은 영혼이 결혼생활에서 번창했는가?
최초의 불화에 서로 빗장을 걸어 잠글 것이 아니라 불화를 함께 해결해나가기로 약속한다는 측면에서 보면, 결혼은 영혼의 고귀한 투자이다.
그러나 안전지대나 경제적 합의, 부모를 기쁘게 하거나 사회적 승인을 얻기 위한 방법으로 택하는 결혼은 혐오스럽고 영혼을 해친다.
그렇기에 우리는 가족이라는 제도가 구체적인 상황에서 영혼을 풍성하게 가꾸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가족에 대해서도 이러한 어려운 질문을 던져야 한다.
모든 가족에 대해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져야 한다.
'여기서 영혼은 얼마나 풍성해지는가? 가족이 더 큰 삶의 모델을 제시하지 못해 구성원들의 삶에 피해를 안기지는 않는가? 가족 사이에 팽배한 두려움이나 한계라는 유리 천장에 의해 구성원들의 삶이 제한을 받고 있지는 않은가?'
"너는 우리에게 아주 소중한 존재야. 너는 언제나 우리의 사랑과 응원을 받을 거야. 네가 세상에 태어난 것은 너 자신의 삶을 가꾸기 위해서란다. 남에게 절대로 해를 입히지 말되, 네가 될 수 있는 만큼 충분히 되려는 노력을 멈추지 마. 너는 넘어지고 실패할 때에도 여전히 우리의 사랑을 받을 것이고 환영을 받을 거야. 하지만 네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우리를 떠나기 위해서야. 우리를 기쁘게 해주는 그런 일에 대해서는 조금도 걱정하지 말고 너의 운명을 개척하며 꿋꿋이 나아가도록 하렴."
"대체로 아이에게 정신적으로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것은 부모가 살지 못한 삶이다."
융이 전하고자 하는 바는 부모가 성장하기를 멈추고 두려움에 떨며 인생 여정의 모험을 감수하지 못할 때, 그러한 부모의 모델과 제약 그리고 영혼을 거부하는 태도가 아이에게 내면화된다는 뜻이다.
그 결과, 성인이 된 아이가 부모가 되었을 때, 이 패턴은 또 다른 가족과 또 다른 아이에게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기본적으로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 자기 부모의 패턴을 되풀이하지 않는다고 해도, 부모가 살지 못한 삶을 극복하려 노력하면서도 여전히 그것에 제한되거나 영혼의 깊은 상처를 달래기 위해 알코올이나 일에 중독되는 현상을 보일 것이다.
이런 영향을 의식하지 못하면 패턴을 되풀이하거나 그것을 보상하려는 시도가 강력하게 작용할 것이다.
자신의 여정에 온전히 책임을 질 수 있고 그 여정을 자식에게 투사하지 않아야 진정으로 성숙한 단계에 이른 부모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삶 중 많은 것들이 죄의식의 지배를 받는다.
만약 어떤 사람이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 건강하고 정직한 일이며, 또 다른 사람의 요구에 종종 한계선을 그을 필요가 있다는 것을 충분히 의식할 수 있다면, 그것이 과연 무슨 잘못이겠는가?
죄의식을 유도하는 것은 사실 의존적인 부모가 즐겨 사용하는 전략일 수 있다.
이런 부모는 아주 일찍부터 자식을 통제하기 위해 죄의식을 이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고분고분한 행동을 강요하는 죄의식이 실은 불안을 관리하기 위한 것임을 인식한다면, 그는 아마 그 불안에 맞설 수 있을 것이고 가족 중에서 유일하게 성숙한 어른으로서 언제 죄의식을 멈춰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이 될 수 있다.
현대의 가족은 각자의 영혼이 추구하는 다양한 가치를 지지하고 격려하며 존중하는 장소이다.
다양성은 그냥 허용되는 것이 아니라, 관계의 근본적인 선물로 높이 칭송되어야 한다.
갈등은 서로가 일치하지 않더라도 받아들여지는 사랑으로 중재될 수 있으며, 어느 누구도 자신이 추구하는 존재가 아닌 다른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부담을 져서는 안 된다.
모든 가족이 이런 점을 의식한다면, 거기서 얼마나 큰 자유가 일어나겠는가!
영혼이 번성할 곳으로 그만한 곳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영혼을 이렇게 소중히 여기는 것은 모든 위대한 종교에 담겨 있는 가장 오래된 진리를 재발견하는 것과 같다.
사람은 자기가 대접받고 싶어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해야 한다는 그 진리 말이다.
현대적 가족을 창조하려면 성숙과 용기, 개인적 모험이 필요하다.
비록 사랑하는 사람들이 곁에 있더라도 결국 우리 스스로 서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자기 자신을 찾는 고독한 여정에 나서는 각 구성원을 응원할 수 있다.
이렇게만 된다면 가족은 마무리되지 않은 과거에 좌우되지 않는 영혼의 대리자가 될 수 있다.
7장
많은 사람에게 친밀한 관계 다음으로 만족을 추구할 수 있는 분야가 바로 직업이다.
우리 의식적 에너지의 대부분은 다른 어떤 부분보다 직업에 집중된다.
물론 우리는 물질적 생존을 유지하기 위한 방법을 찾아야 하지만, 우리의 일은 눈에 보이지 않는 더 큰 짐을 지고 있다.
그 짐이란 바로 일이 우리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또 정신에 활력을 불어넣어줄 것이라는 기대이다.
'직업(career)'과 '소명(vocation)'의 라틴어 어원인 '보카투스'는 '부름'을 뜻한다.
이는 영혼이 우리를 소환한다는 의미이다.
물론 우리는 생계를 이어가야 하고, 우리 자신만 아니라 우리에게 의존하고 있는 사람들까지 부양해야 한다.
그러나 그 외에도 영적 성장을 꾀하라는 소환도 있다.
그것이야말로 우리의 진정한 소명이다.
현대 세계에서 우리는 생산적이면서도 양육적인 방식으로 존재하도록 요구받고 있으며, 더 나은 선택을 위한 지혜의 비밀스러운 원천인 내면적 삶까지 점검해야 한다.
남녀 모두 양육과 권능 부여라는 두 가지 과제에 직면해 있다.
권능 부여는 다른 사람들에게 권력을 행사한다는 뜻이 아니다.
자신의 가치와 존재 양식을 스스로 선택할 능력을 키운다는 뜻이다.
우리는 어떤 관계나 외부의 합의된 세계에 우리의 가장 깊은 욕구를 충족시키거나 개인적 가치감을 제공해달라고 요구할 수 없다.
선택에 대한 책임은 결국 우리 자신에게 있다.
우리 삶에서 자신을 양육하고 권능을 부여해야 할 사람도 결국에는 우리 자신이다.
직업은 선택할 수 있지만 소명은 선택할 수 없다.
소명이 우리를 선택한다.
우리를 선택한 그것을 선택하는 것은 곧 일종의 해방이며, 이 해방의 부산물로 적절한 일을 찾았다는 느낌이 들고 내면에 조화가 일어날 것이다.
설령 갈등의 세계를 초래하고, 인정받지 못하고, 개인적으로 상당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말이다.
영혼은 이미 인생 후반기의 계획 쪽으로 이동했는데도 종종 우리는 인생 전반기의 목표를 추구하며 살아간다.
인생의 전반에는 두려움을 물리치고 세상으로 나아가도록 하는 야망이, 자아의 추진력이 차지할 자리가 있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인생 전반기의 주요한 임무는 인간관계를 형성하고 또 스스로를 뒷받침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한 자아를 구축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자아나 자아의 다양한 역할과 자신을 과도하게 동일시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 자아의 역할을 아무리 성공적으로 수행해냈다 하더라도, 또 그 역할이 아무리 소중하다 할지라도, 자아와의 동일시만으로는 장기간에 걸쳐서 영혼을 만족시키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삶을 점검하고 또 위험한 변화를 추구할 만큼 충분히 강해져야 한다.
대부분의 욕망이 무용하다는 점을 그리고 대부분의 문화적 가치가 주의를 흩뜨려놓는다는 점을 직시할 만큼 강한 사람, 또 신경증적 경향이 있는 문화에 적응하려는 노력을 포기할 수 있는 사람은 결국 성장과 더 큰 목표를 발견할 것이다.
자아의 가장 큰 임무는 자신의 껍데기를 깨고 더 멀리 나아가면서 콤플렉스 덩어리인 자아나 문화의 가치가 아닌 영혼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에 이바지하는 것이다.
인생 전반의 콤플렉스에 의해 추진되고 정의된 자아의 야망을 포기하는 것은 결국 새롭게 발견된,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풍요로움으로 경험될 것이다.
자아의 야망을 포기한 사람은 자신의 허약한 정체성을 강화해준다고 여겨지던 일을 해야 한다는 부담에서 벗어나, 본질적으로 가치 있는 일을 할 자유를 얻을 것이다.
일이 의미 있기 때문에 그 일에 종사하고, 그렇지 않다면 일을 바꿀 것이다.
만약 누군가가 인생 여정에 필요한 고독을 받아들일 만큼 강하다면 그는 인생의 무상과 쇠퇴 앞에서 우정과 관계의 산물을 더욱 소중히 여길 수 있다.
그 사람은 영혼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삶의 조용한 기쁨을 경험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수정된 삶이 결국에는 더 훌륭하게 느껴질 것이다.
그런 사람은 자신의 삶이 의미로 가득 차고 점점 더 큰 신비로 열리는 경험을 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열악한 환경일지라도 소명은 언제나 신성한 것에 대한 부름이다.
그것은 아마 더 큰 신성과 조화를 이루기를 바라는 우리 내면의 신성일 것이다.
궁극적으로 우리의 소명으 우리가 가진 수천 가지 변형 속에서 우리 자신이 되는 것이다.
이 초대는 자아의 위로와 혼동을 일으키기 쉽다.
우리 자신이 되려면 실제로 자아의 반복적인 굴복이 필요하다.
하나의 소명으로서 인격을 성취하려면 언제나 더 큰 것에 대한 항복과 복종이 요구된다.
이때 자아의 필수적인 과제는 자신의 이익을 초월하여 '내 뜻이 아니라 당신의 뜻대로'라고 말하고 협력하는 것이다.
"자아의 계획이 죽지 않고는, 너는 살지 못할 것이다."
개성화는 자아가 초월적인 것에 복종하는 것이다.
융은 이 과제가 복잡하고, 평생 이어지고, 또 힘들 것이라고 설명한다.
우리 모두는 부모의 기대를 성취하는 데에, 문화나 남녀 역할이 인정한 형태의 안정을 확보하는 일에 그리고 물질주의와 방종, 쾌락주의 같은 동시대의 가치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고 있다.
우리 각자는 그렇게 수동적으로 순응함으로써 고통받았고, 계속해서 고통받고 있다.
의식이 영혼에 복종하고 또 영혼과 정직한 대화를 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강해질 때, 우리는 치유를 경험하고, 일과 소명 그리고 직업과 소명의 차이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구분을 하지 않고 살 때, 우리는 자기 자신과 자식들을 배반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영혼에 대한 이러한 항복의 순간에 우리는 신성의 존재 앞에 있으며 그 의도와 조화를 이룰 것이다.
"지금 나는 보는 방법을 배우고 있다. 그 이유는 모르지만, 모든 것이 나의 내면으로 더욱 깊이 스며들면서 지금까지 늘 멈추곤 했던 거기서 멈추지 않고 있다. 나는 지금까지 나 자신이 몰랐던 내면의 자기를 갖고 있다. 지금 모든 것은 그 내면의 자기 쪽으로 가고 있다.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나는 모른다."
이러한 사람은 자아의 위치를 재조정하고 영원의 구조 안에서 살아간다.
이러한 사람은 신들이 의도한 바, 즉 신성한 소명이 되라는 부름을 듣고 그에 응답하고 있다.
8장
우리 문화가 중독에 얽매여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거대한 산업까지 단절의 불안을 관리할 수 있도록 돕겠다고 나서고 있다.
그럼에도 자신의 중독에서 주의 산만의 패턴을 기꺼이 직시하고, 또 우리에게 공통적인 상처를 보다 의식적으로 경험하려 하고, 자신이 이미 느끼고 있는 것을 진정으로 느끼려고 노력하는 사람만이 성장의 희망을 품을 수 있다.
심리학의 근본적 진리 중 하나는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할 만큼 충분히 확장되려면 대개 고통을 경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진리를 우리의 자아는 보지 않으려 든다.
지속적인 편안함의 길은 중독의 순환적인 덫으로 이어진다.
덫에 걸리면 우리는 휴식도 희망도 없이 계속 똑같이 반복되는 역사의 바퀴에 완전히 묶일 것이다.
세상을 심리학적으로 읽는 것은 자신의 삶을 보다 사려 깊게 읽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숨겨진 동기와 오래된 의제, 반복적인 패턴, 타인에게로 투사된, 살지 못한 삶 등을 식별하는 것이다.
언제나 의식적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삶의 많은 부분이 자동적으로 돌아간다.
심리학적인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내면에서 개인적인 신화를 새롭게 발견할 필요가 있다.
아무리 의도가 훌륭한 이데올로기나 제도일지라도, 거기에서는 그런 신화가 절대로 발견되지 않을 것이다.
영혼은 이따금 우리가 듣고 싶지 않은 방식으로 우리에게 말을 걸 것이다.
하지만 영혼은 언제나 말하고 있으며, 눈에 보이는 세상을 알리고 움직이고 형성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해 우리에게 들려준다.
심층 심리학의 가장 훌륭한 선물은 이 신비와 깊은 대화를 할 가능성을 다시 우리에게 돌려준다는 점이다.
심리학적인 존재가 된다는 것은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표면 아래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과거 어느 때보다 훨씬 더 근본적으로 묻는다는 뜻이다.
우리 모두는 표면에 너무 쉽게 홀린다.
그러나 우주를 움직이고 있고, 또 위대한 신화들을 움직였고, 우리 조상들을 움직였던 그 에너지는 지금도 당신의 내면에서 움직이고 있다.
심리학적인 존재가 된다는 것은 표면 아래에 있는 에너지의 원천이 겉으로 드러날 때까지 그 표면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는 의미이다.
또 현대인이 된다는 것은 의미와 선택, 행동에 전적으로 책임을 지는 존재가 된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이곳에 아주 짧은 시간 동안 머문다.
이곳을 떠나기 전에, 우리가 자신의 인생 여정과 다시 연결되었다고, 우리 신화를, 진정으로 가치 있는 신화를 다시 발견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면 정말 멋지지 않을까.
9장
인생 후반에 반드시 해야 할 중요한 과제가 두 가지 있다.
첫 번째 과제는 개인의 권위를 회복하는 것이다.
무슨 뜻일까?
우리 모두는 어릴 때 순진하고 의존적이었다.
필요한 적응을 일상적으로 되풀이하다 보면 점진적으로 권위를 자신의 밖에 두게 된다.
시간이 지나면 이 외적 권위는 콤플렉스로 내면화되고, 내부로부터 우리를 지배하기 시작한다.
겉으로 보기에 대단히 강해 보이는 사람조차도 이런 내면의 폭군에게 지배를 받는다.
우리는 스스로를 의식적 주체라고 믿는다.
하지만 사실 대부분의 시간 동안 우리는 개인적 역사의 우연성과 우리 시대의 다양한 가치관에서 파생된 이러한 권위 집단의 지배를 받고 있다.
개인적 권위의 회복은 영혼이 우리 모두에게 부과하는 일상적 과제이다.
'개인의 권위'란 무엇인가?
간단히 말하면, 개인의 권위는 자신에게 진정으로 다가오는 것을 발견하고 세상에서 그것을 살아간다는 의미이다.
우리에게 진정으로 다가오는 것이 세상 속에서 실현되지 않고 있다면, 그것은 아직 우리에게 진정한 것이 아니다.
개인의 권위는 우리를 통해서 존재하고자 하는 것들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것이다.
당신에게 진정으로 중요한 것을 발견하고 또 세상에서 그것을 살아갈 용기를 발견하라.
그러면 때가 되면 세상이 당신을 존경하게 될 것이다.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얻거나 과거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일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는 개인의 권위는 바로 개인의 영성을 발견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처럼 결정적으로 중요한 초대장을 자신의 문화나 어린 시절의 경험으로 더럽히는 사람이 너무 많다.
그들은 더 성장하고자 하는 영혼의 갈망을 익숙한 제도나 교리, 관행과 혼동한다.
개인적 경험을 통해서 영성을 직접 확인하고 뒷받침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역사나 가족으로부터 받은 영적 전통은 개인의 삶에 실질적인 차이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그 사람이 조건화된 반사적 반응으로만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오직 경험적으로 진실한 것만이 성숙한 영성에 합당하다.
경험적 영성은 우리를 확장시키고 가끔은 우리를 시험하기도 하지만 언제나 우리가 더욱 성장하기를 요구한다.
성숙한 영성은 좀처럼 우리에게 대답을 제시하지 않으며 오히려 점점 더 큰 질문을 던질 것이다.
성숙한 영성은 인생 후반에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 문제를 대면하지 않으면 우리를 기만하고 더욱 작게 만드는, 가족이나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가치들에 종속된 상태에서 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영적으로 성장한다는 것은 우리의 가능성을 두루 찾아내고, 우리 내면에서 공명을 일으키는 것을, 말하자면 다른 사람의 경험이 아니라 우리의 경험으로 확인되는 것을 발견하고, 우리에게 진실한 것으로 확인된 것을 기꺼이 지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이유로, 개인의 권위를 발견하고 또 성숙한 영성을 발견하는 과제는 쌍둥이처럼 서로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상징과 은유는 인간의 가장 탁월한 재능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문화와 영성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동물은 신비를 산다.
그러나 인간은 신비를 신비로 경험한다.
인간은 분명 제한적이지만, 그럼에도 은유와 상징이라는 도구를 통해 광대한 신비에 접근할 수 있다.
우리 꿈에 나타나는 이미지들이 그런 식으로 저절로 형성되는 상징, 말하자면 유한한 의식과 초월적인 것을 서로 연결하는 상징의 좋은 예이다.
자아는 오랜 세월을 두고 자신의 구성물을 특권화하고, 또 그것을 외부 현실이나 신비와 혼동하는 경향을 보인다.
우리의 유한한 감각은 '신'이라고 불리는 무한한 신비를 궁극적으로 알 수 없다.
우리는 초월의 경험을 하고 그것을 '신'이라는 이름으로 부르지만, 우리가 신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름이나 이미지가 아니라 그 이미지 뒤에 있는 깊은 에너지다.
이 에너지가 이미지에 신비한 힘을 불어놓는다.
이에 대해 카를 융은 이렇게 설명한다.
"사실, 자발적으로 생겨났거나 전통에 의해 신성시된 이미지들을 사용하지 않고서는 신의 실재를 스스로에게 증명하기란 불가능하다. 순진무구한 사람은 이 이미지의 정신적 본질과 효과를 불가지한 초자연적 배경과 절대로 떼어놓지 않았다. 순진무구한 사람은 인상적인 이미지와 그 이미지가 가리키는 초월적인 무엇인가를 즉시 동일시한다. 그 이미지와 그에 대한 설명은 그것들의 초월적 대상과는 다른 정신 작용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그 이미지와 그에 대한 설명은 초월적인 대상을 상정하지 않고, 다만 암시할 뿐이다."
우리는 신에 대한 이미지나 자연의 심오함, 혹은 정신적 황홀 상태를 경험할 뿐, 그것들이 생겨나는 에너지의 원천을 경험하는 것은 아니다.
그 원천은 신학자 카를 바르트의 말을 빌리자면 '절대적인 타자'로 남아 있다.
바로 그 점이 절대적인 타자를 신비하게 만든다!
자신이 상징이나 은유를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심리학적으로 더 성숙한 수준의 의식을 갖고 있으며, 또 그런 종교적 선언의 주관적 성격을 객관적 특성보다 더 잘 인식할 수 있다.
이런 사람은 글자의 뜻을 그대로 해석하는 망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영혼이라는 단어는 당신 안에서, 내 안에서, 자연 안에서, 혹은 꿈의 이미지 안에서 이 세상의 물질을 가장하여 흐르고 있는 자율적인 에너지를 일컫는 단어임을 기억하라.
그 에너지는 우리에 의해 경험됨으로써, 우리를 통해 영혼이 된다.
그래서 한 예로, 타인이 우리 내면에 사랑을 일으키고 구현할 수 있지만 이는 우리의 주관적인 상태로 경험된다.
영혼은 우리 밖에 존재하지만 우리 본성의 중심적인 무엇인가는 유사한 특성을 가지고 있으며 서로 연결되기를 바란다.
영혼의 이러한 외부적 움직임이 바로 '누미노스'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바이다.
이 단어의 어원은 '우리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거나 손짓해 부르다'라는 뜻이다.
따라서 우리가 영혼을 찾는 것처럼 영혼도 우리를 손짓해 부른다.
"그대가 찾고 있는 것은 가까이 있으며, 이미 그대를 만나러 다가오고 있다."
싸구려 영적 재화가 넘쳐나는 시대에 성숙한 영성을 회복하거나 재구성하기 위해서는, 먼저 영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형성되고 개인에게 어떤 식으로 이바지할 수 있는지 그리고 우리가 영성의 과거로부터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성찰해야 한다.
이 형식이나 이미지, 혹은 내러티브가 다루려는 보편적이고 시대를 초월한 질문은 무엇인가?
이 인물 혹은 이 전설이 이 보편적인 질문에 대해 제시하는 대답은 무엇인가?
나의 동시대 문화는 이 문제를 어떤 식으로 다루고 있는가?
동시대 문화가 이 문제를 다루는 방식 중에서 어느 정도가 나 자신의 경험으로 확인되는가?
우리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말하자면 우리 내면에 어떤 공명을 일으키는 이미지라야만 진정으로 유익한 이미지가 될 수 있다.
만약 그런 공명이 일어난다면, 어떤 숨겨진 조화 속에서 같은 것끼리 활성화되는 것이며, 이때 우리는 그 이미지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그 의미를 느낀다.
첫째, 영구히 제기되는 질문은 모든 시대에 매우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며, 우리가 의식하든 그렇지 않든 우리 삶의 가치를 결정하는 데 영향을 미친다.
둘째, 우리 선조들은 지금 우리를 자극할 수도 있고 그러지 못할 수도 있는 형태로 삶의 심오함을 경험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과 우리 자신을 위해 진지하게 탐구할 의무가 있다.
셋째, 우리 문화는 우리 인간성에 깊이를 더하고 인생 여정에 가치와 무게를 부여하는 이러한 질문으로 우리를 이끄는 데 처절하게 실패하고 있다.
이 마지막 사실은 영혼의 광대함에 대한 배신이며, 따라서 집단이 각 개인을 기만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 공명을 기준으로 한 테스트는 삶에 깊은 연결과 의미를 안겨줄 영성을 키우는 우리 능력에 매우 중요하다.
우리의 대부분의 가치관은 시대정신과 남녀 역할, 경제 개념 그리고 자신이 태어난 가족의 정신 역학에 의해 부과된다.
내면의 항의가 다가오기 시작하거나, 아니면 우리가 세상에서 다른 예시들을 발견할 특권을 얻었거나, 또 우리가 스스로를 보살필 능력을 획득했을 때에야 우리는 자신의 역사로부터 자기 인생을 되찾을 수 있다.
현대인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가 가치를 선택하는 책임이 부족과 제도로부터 개인으로 이동했다는 것임을 기억하라.
이는 특권인 동시에 책임이기도 하다.
공명의 원칙, 즉 외부 권위가 아닌 내적 증거가 영혼에 충실한 삶을 영위하는 데 가장 확실한 안내자로 받아들여질 때, 우리는 심리학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
우리는 '메타노이아', 즉 의식의 긍정적 변모를 경험한다.
말하자면 우리 자신이 물질의 시대에 물질의 형태로 다듬어진 영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는 뜻이다.
"우리 이전의 모든 세대는 어떤 형태로든 신을 믿었다. 오직 비할 데 없는 상징의 빈곤만이 우리로 하여금 신들을 정신적 요소, 즉 무의식의 원형으로 재발견할 수 있게 했다. 이 모든 것은 상징을 소유한 시대나 문화에서는 전혀 불필요할 것이다."
우리를 위한 에너지를 담고 있는 이미지들은 '이미지의 세계', 즉 물질세계에 생명을 불어넣는 정신세계에서 나오며, 볼 수 있는 세계와 볼 수 없는 세계 사이의 연결을 제공한다.
더 깊은 영역이 의식적으로 구현되도록 하는 영혼의 이 같은 자율적 활동을 융은 '초월적 기능'이라고 불렀다.
이는 의식의 영역과 무의식의 영역 사이의 장벽을 초월하려고 노력하는, 우리의 자기와 우주의 상호작용을 말한다.
매일 밤 나타나는 이미지들은 그 자체로 신성은 아니지만, 방문하는 신들이 그 이미지들에 신성한 에너지를 불어넣는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이미지를 통해 다시 신들과 연결된다.
꿈의 이미지는 영혼이 주는 놀라운 선물이다.
"당신은 당신의 내면에 있는 그 장소를, 말하자면 당신에 대해 너무나 많은 것을 알고 있고 또 당신의 이익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은 그곳을 찾아내서 존경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내면의 권위를 발견하고 개인의 정신적 고결을 회복하는 길이다.
성숙한 영성의 발견은 우리의 자아가 더 큰 신비의 작은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내면화할 수 있을 때만 가능하다.
이 신비는 우리 내면에서뿐만 아니라 우리 밖에서, 우주 안에서, 자연 속에서, 타인들의 내면에서도 작용하는 신비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더 진지하고 용기 있는 질문을 던지라는 요구를 받고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탐구적 질문이 없다면 우리는 자신에게도 이롭지 않고 우리 문화에도 이롭지 않은 옛날의 패턴으로 아주 쉽게 되돌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주변 세상과 내면의 세계를 주의 깊게 조사함으로써 심리학적인 존재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세계의 거의 모든 것들에 존재하는 종교성을 보고, 그런 형태들이 영혼에 합당한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우리는 이 해방의 원리인 공명에 주목하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만약 무엇인가가 우리 내면에서 공명한다면, 그것은 어쨌든 우리에 관한 것이고, 우리를 위한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자아가 아무리 의지하고 전통이 아무리 뜨겁게 숭배한다고 해도 결국 그것은 영혼을 배신하고 말 것이다.
성숙한 영성은 성숙한 개인을 요구한다.
성숙한 영성은 이미 우리 각자의 내면 안에, 그러니까 신비가 우리에게 다가올 때 그것을 신비로 받아들일 줄 알고 그 신비에 질문을 던지고 변화와 성장의 위험을 감수하고 살아 있는 한 우리 인생 여정을 재조명할 수 있는 우리 잠재력 안에 있다.
우리가 이 개인적 권위에 대한 책임을 향한 발걸음을 내딛을 준비가 얼마나 되어 있는지는 두고 봐야 할 것이다.
그것은 우리 각자가 지켜야 할 약속이다.
10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