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화하고 부드러운 것들>

2022. 2. 9. 08:59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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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에서)

 

세상에 닳아서 좋은 점도 있다니

 

굳이 민감하게 굴지 않아도 되는 곳에서는 민감하게 굴지 않는것. 올바른 도리나 논리를 핑계로, 타인의 개인적인 세계에 함부로 난입하지 않는 것. 내가 지나쳐도 되는 것, 내가 지나쳐야 하는 것을 무심히 지나치는 것.

그런 것들이 가능한 세계는 나에게 너무 아득하다 못해 초현실에 있는 듯한 세계였다. 늘 그랬는데... 지금 나는 그 세계의 진입로를 지나치고 있다. 진실로 감개무량하다.

이토록 느슨하고 평화로운 세계라니. 보던 것보다 훨씬 아름답고, 듣던 것보다 훨씬 아늑하다.

 

민감함은 나에게 여러 가지 재능을 주었지만, 과도한 생각과 감각으로 인한 만성 피로와 불안도 주었다. 그런데 이제 나는 완벽하게는 아니지만 선택적으로 민감해질 수가 있다. 내 안의 여러 곳들이 닳을 만큼 닳았기에 가능해진 일이다. 

 

필요한 만큼은 스스로를 닳게 할 수 있는 일에 지금은 열심이다. 나는 내가 좀 더 닳았으면 좋겠다. 똑똑하고 따뜻한 방향으로. 닳아서 반들반들해진 그 자리에 누군가를 앉히고 싶다. 그 사람과 불필요한 다툼 없이 오래 마주 보고 웃고 싶다.

 

덜 사랑해서 자꾸 생각나나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끝이 난 지 20년이 다 되어 가는 관계 밑에 여전히 남아 있는 이 마음은 대체 뭘까. 나는 더 기다려야 할까. 그것마저 흩어지기를. 아니면, 그것을 가지고 뭐라도 해야 할까. 그게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근데 그게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 줄 모르는 채로, 내가 뭘 해야 하는 걸까.

생은, 그 뜻을 알 수 없는 또는 알기 어려운 부산물들을 수없이 남긴다. 거대한 수수께끼 같은 인간의 생 앞에서 당신은 어떤 기분을 느끼는가. 

 

인간이 자기 생에 딸린 모든 것들의 의미를 다 알고 살 수는 없다는 점을 나는 선선히 인정한다. 나는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들의 의미를 알고자 하지 않는다. 그런데 고인돌처럼 굳건하게 남아 있는 감정이나 기억을 바라보고 있으면, 한 번씩 맹렬한 호기심을 느낀다.

 

이건 대체 왜 여기에 이토록 하염없이 남아 있단 말인가. 이게 대체 무엇인가. 이것과 나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는가. 더 살아 보면, 내가 그 답을 알 수 있겠는가. 내가 그 답을 모르는 것이 어쩌면 어떤 업보이겠는가. 내가 무엇을 해야 그 답을 알 수 있겠는가. 다른 사람들도 이렇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물음표들을 헤치며 살아가는가. 이 엄청난 수량의 물음표들 때문에 한 번씩 어지러워하는 게 나뿐이겠는가. 그런데 나는 왜 하필 이 감정 또는 기억의 정체를 간절히 알고자 하는가. 이 강력한 끌림이 존재하는 데는 어떤 이유가 있지 않겠는가.

 

깨달음을 얻은 고승들은 말한다. 이 우주에 우연은 없다고. 이유없는 사건 없다고. 모든 것들이 인과관계에 의해 쫀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고.

어떤 원인은 우리의 전생에 있다. 그래서 그 원인의 결과로 우리 앞에 나타난 어떤 사건을 우리는 납득하기 어려워한다. 그 사건이 난데없는 사건처럼 느껴질 뿐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다만 당혹스러워한다. 갑작스럽게 우리를 밀치고 만 그 사건 때문에.

그 감정적인 혼돈 속에서, 우리는 우주의 인과관계 법칙을 불신할 수도 있다. 당장 우리를 곤란하게 하는 이 사건의 원인이 뭔지 도통 모르겠으니까. 이 우주가 돌발적인 변수들로 가득한 공간처럼 느껴져서.

우리의 신뢰 여부와 상관없이, 우리가 그 법칙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순간은 1초도 없다. 우리는 악행을 끊고 선행을 지으며 자신이 지은 카르마를 하나씩 소멸시켜 나가는 수밖에 없다. 업보라는 부메랑이 되돌아오지 않는 곳으로 도망칠 수 있는 방도는 없다. 

 

그런저런 생각들을 하고 있으면, 내 안에 오래도록 남아 있는 생각들이나 느낌들을 한 번은 따라가 봐야 하지 않겠나, 싶다. 그게 나를 어디로 이끌지는 모르지만, 그것이 안ㄴ해 준 곳에서 내가 무엇을 겪을지도 모르지만. 내가 그것을 따라가서 무엇이든 해야만, 내가 어떤 카르마를 소멸시킬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지 않겠나. 하여, 그게 아니라면, 그 생각들과 감정들이 내 안에서 그토록 오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이유가 뭐겠는가. 

 

내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내려놓지 못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어떤 종류의 숙제처럼 여겨진다. 그 숙제라는 것들 전부가, 결국, 제대로 사랑하는 일인 것 같고. 

 

불교에서든, 기독교에서든, 어디에서든, 인간의 정신적 진화를 가능하게 하는 중심 동력은 사랑이다. 진정한 깨달음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진짜 깨달은 사람들은 자기가 뭘 얼마나 안다며 떠벌릴 시간에, 자신이 아는 바를 그저 행한다. 가슴으로 아는 사람은 그 아는 바를 묵묵히 실현할 뿐이다. 

 

무언가의 실체를 마주하는 일

 

정직하게 살아가는 일이 안경 도수를 높이는 일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내가 요령 피우지 않고 세상을 바르게 배워 나갈수록, 흐릿하게 보이던 것들이 내 시야 안에서 윤곽이라는 것을 찾아 나가니까. 그리하여 내가 내 세상의 실체, 내 생의 진면목 같은 것들을 조금씩, 조금씩 더 선명하게 볼 수 있으니까.

너무 당연한 얘기지만, 모든 걸 대충 하며 살아서는 그 무엇도 또렷하게 볼 수 없다. '대충'은 '대충'이니까.

 

어떤 것의 실체와 진면목으로 향하는 것이 매번 즐거운 일은 아니다. 마냥 쉬운 일도 아니고, 때로 사실을 직시하는 일은 고통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그게 당장은 무의미한 일처럼 보일 수도 있다. 이를테면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세상과 사람의 본바탕을 본다는 것이 다 뭐란 말인가. 그게 밥이 되나, 유흥이 되나, 뭐가 되나...'

나는 오래도록 그런 생각을 가지고 살았다. 그래서 본질을 상대해야 하는 귀찮고 까다로운 문제들은 일단 피하고 보았다. 피하고 피하다가 나중에, 억지로 그것들을 해결했다. 대강... 결국 본질을 제대로 상대하지 않고.

그래도 아무 문제 없는 줄 알았다.

 

그렇게 사는 동안, 나는 서서히 깨달았다. 깨닫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무언가의 실체와 한 번은 제대로 마주해야, 내가 그것과 제대로 무언가를 시작하거나 끝낼 수 있다는 것을.

내가 대충 한 것들은 내 것도 아니고, 내 것이 아닌 것도 아니었다. 그것들은 내 생의 경계선에 애매하게 걸쳐져 있을 뿐이었다. 내 생 안으로 들어오지도 못하고, 내 생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내가 성의 없이 시작하거나 끝낸 관계들이 나에게 그 사실을 똑똑히 알려주었다. 그 관계들은 내 생의 경계선에 물려 있는 채로 내 신경을 계속 건드렸다. 그런 것들이 자꾸만 쌓여 갔다.

내 생 안은 공허한데, 내 생의 경계 지점은 늘 북적거렸다. 나는 내가 깡통 인간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게 뭐든, 뭔가를 확실하게 해 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비로소 들었다. 가지든, 버리든, 들이든, 내보내든...

 

나는 내가 무기한 보류하던 것들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더 이상 회피하지 않고 무언가를 똑바로 볼 수 있게 된 때에야, 나는 끝내는 내 나름의 결론에 다다랐다. 무언가를 몸소 겪어야만, 내가 그것에 대한 '내 결론'을 낼 수 있었으니까. 물론, 그 결론이 내 유일한 결론이거나, 최후의 결론은 아니겠지만.

 

그 무렵에 내가 깨달은 것이 또 하나 있다. 내가 왜 그 많은 것들을 대충 하며 살았는가, 하는 점인데... 나는 두려웠다. 대충 했다가 실패하면 대충 했다는 핑계라도 댈 수 있지만, 열심히 했다가 실패하면 댈 만한 핑계가 없으니까. 쪽팔리기만 하니까. 내 실력이 다 들통나고.

 

내 실력이 탄로되는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 항상 절반의 최선만 다하며 살았다니, 좀 우습기도 하고 황당하기도 한데... 당시 나는 정말로 창피당하기 싫었다. 그게 죽는 것보다 더 싫었다.

모자란 내 자신을 내가 창피스럽게 여겼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도 그런 나를 부끄러운 존재로 볼 줄 알았다. 그래서 나는 누구 앞에서도 쫄딱 망하려 하지 않았다. 아무에게도 내 밑바닥을 보여주지 않았다. 내 가족에게도.

이 또한, 내가 불완전한 스스로를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이런 걸 보면, 자존감 문제가 인간의 모든 문제와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다.

 

존재 자체가 의미 아닌가

 

무엇은 언제나 무엇이다.

그러나 "무의미하다."라는 말은 언제나 거짓말인지도 모른다. 무언가의 의미를 찾지 못하는 인간은 있을 수 있어도,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않은 것은 존재할 수 없지 않을까. 우주와 우주 만물에 대한 신의 계획까지는 모르겠지만, 어쩐지, 무의미한 존재라는 건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된다. 존재 자체가 의미 아닌가.

 

사람을 사랑하는 일

 

몸이나 마음이 힘들어도 그냥 하게 되는 일들 대부분은 타인의 행복이나 안녕과 연결되어 있다. 누군가의 행복이나 안녕 또는 안전을 위해, 나 자신의 수고를 인내하는 순간들... 어느 선량한 사람의 생은 그런 순간들로 가득이겠다. 

사람이 이승에서 애써 하는 일이라는 것들 대개가 근본적으로는 사람을 사랑하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결론에 다다르는 순간들이 많아진다. 

지식이 범람하고 범람하여, 온갖 현상들을 설명하는 온갖 말들이 사람들의 머릿속과 마음속을 혼미하게 만든다. 생의 실상이라는 것이 어쩌면 이토록 간단한 것일 수가 있는데.

 

그 내면이 생생하게 살아 있는 인간

 

마침 내 앞에 나타나 나를 돕는 것들로 인한 즐거운 경험은 매번 영적인 경험이라고 느껴진다. 

그만큼 그런 경험은 신비롭고, 한편으로는 자극적이다.

나는 내 온몸이 쩌릿해지는 것을 느낀다.

내가 마침 알게 된 영화 안에 나에게 필요한 이야기가 있어서, 내가 마침 마주하게 된 사람이 나에게 필요한 마음을 주어서.

내가 마침 열어 보게 된 박스 안에 내 일을 수월하게 해 줄 단서가 있어서.

어떻게 이게 하필 지금 내 앞에 나타난 거지, 하는 생각을 하며, 나는 전율한다.

 

그 뜻밖의 경험들은 나를 무지의 지대에서 지혜의 지대로 옮겨 놓는다.

물음표의 지대에서 느낌표의 지대로 옮겨 놓는다.

고민의 지대에서 실행의 지대로 옮겨 놓는다.

감사한 일이다.

작으면서도 작지 않은 기적이고.

 

2.

 

전율이라는 단어가 문득 내 시선을 잡아챈다.

나는 내 마음이 무언가로 인해 아직도 전율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자각한다. 

그 자각이 내 안의 생명력을 증명한다. 

나는 여전히 살아 있다.

몸이 떨리도록 무언가에 감격할 수 있는 삶을 가진 것에 큰 감사를 느낀다.

나에게 그런 감격을 주는 대상이 사람일 때 내 안에서 솟구치는 감사는, 화장실 안에서의 쾌재나 조용한 환호 안에 다 들어가지 않는다.

 

어떤 대상을 사랑하여 따뜻해진 내 몸과 마음을 발견할 때마다, 나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다. 그 온화하고 부드러운 것들이 이 세계 전체를 파괴할 수 있는 공격들로부터 나를 지켜줄 때도 있었다.

 

내 사랑은 나를 강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게 나에게 굉장한 근육들을 주거나, 새로운 뼈대들을 준 건 아니지만...

그것은 명백하게 나를 내적인 면에서 강화시켰다.

 

그 내면이 생생하게 살아 있는 인간을 진실로 파괴할 수 있는 것은 그 자신뿐이겠다.

그 몸이 산산이 깨져도, 그 정신만 온전하다면, 그 사람은 여전히 온전한 인간이겠다.

 

나는 이 두 문장을 믿는다.

때로는 간접적으로, 때로는 직접적으로 경험해 보았기 때문이다. 

부서져도 부서지지 않는 인간이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런 인간을 만드는 근본적인 요소는 사랑이었다.

오직 사랑이었다.

 

뭔가를 모를 때는, 그냥 그걸 모르고만 있는 것이 최선인 것 같다.

내 무지에 대한 창피함을 어떻게 해 보려고, 내가 모르고 있는 그것을 나쁘게 평가하거나 내 삶 밖으로 물리치지 말고.

 

잘 살아야지

 

내 목 안쪽에 남아 있는 동시에 남아 있지 않은 그 자국들을 굳이 보여주고 싶은 사람이 생기면, 그 사람과 평생을 같이 살고 싶다.

나는 그 사람에게 이 말을 자꾸 해 주고 싶고, 그 사람도 이 말을 자꾸 했으면 좋겠다.

잘 살아야지.

그리고 하늘이 맑은 어느 날, 그 사람과 내가 마주 보며 이렇게 말했으면 좋겠다.

다행히 잘 살았다.

그건 우리가 함께여서 가능한 일이었다.

모든 날이 감사한 날이었다.

축복과 기적이 관여하지 않은 날은 단 하루도 없었다.

가장 순수한 진심에서 나온 그 말들을 그 사람과 기쁘게 주고받고 싶다.

 

왜 어떤 사람과의 만남은 나로 하여금 '모두의 더 나은 삶'을 꿈꾸게 만드는 걸까. 

그런 관계는 나에게 작고 환한 소망을 안긴다.

그게 누구이든 상관없으니, 누군가가 지금보다 좀 더 많이 웃으며 살기를...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이 온 우주를 사랑하는 일로 확장되는 것이다.

 

2.

 

살아갈수록, 사랑이 연민을 닮아가는 것 같다. 

연민을 동반하지 않은 사랑이 과연 사랑일까, 하는 생각이 문득문득 든다.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삶 전체를 부둥켜안는 일이다.

아픔도 상처도 없는 삶은 없다.

그러니 진실한 사랑과 연민은 떼어놓을 수 없는 것들이겠다.

 

누가 누구를 만나든 모두가 뻔한 생활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는 이유만으로, 아무나 만나고 싶지는 않다.

어차피 가야 할 곳이라면, 그곳에 갈 때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의 손을 잡고 싶다.

그리고 모든 관계가 똑같은 지점에 당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만큼, 나는 이제 약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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