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우마 대물림을 치유하는 법>

2023. 4. 23. 07:53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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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는 글
 
부모의 삶을 반복하는 것은 비단 드라마에서만 있는 일이 아니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부모에게 매여 있으며, 이것은 부모에게 귀속되고자 하는 본능에서 기인한다.
부모의 불행을 부모의 운명이라 여기고 물러났을 때, 자식은 부모와 다른 삶을 살 수 있다.
과거에서 현재까지 우리 사회는 상실 트라우마가 대물림되고 있다.
세상이 좋아졌다고 하지만 근현대사는 상실의 연속이었다.
부모와 조부모 세대의 상실감은 정서로 대물림되어 자녀에게 이어지고 있다.
내가 가족세우기에서 본 것은 윗대에서 제외된 가족원의 의식과 정서를 똑같이 느끼는 후손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나의 문제는 나만의 문제가 아닐 수 있다.
개인의 트라우마는 '트라우마를 만들어내는 가족관계의 구조와 사회의 관습 등 집단양심'을 함께 살필 때 벗어날 수 있다.
우리 사회는 근현대사 비극의 뿌리가 깊게 잔재해 있다.
이로 인한 큰 트라우마는 세대와 세대를 거쳐 이어져오고 있다.
나의 트라우마가 부모 세대와 윗대에 걸린 트라우마의 대물림에서 비롯되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기만 해도, 트라우마를 바라보는 인식이 달라질 수 있다.
이 책은 우리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사랑으로 상호작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개인이 심리적 어려움을 자기 탓으로만 여겨 죄책감에 시달리기보다,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관계 구조와 다세대 대물림까지 전체적으로 보며 서로 존중하면서 홀로 존재할 수 있는 힘을 제시한다.
이 과정을 통해 부모 형제뿐만 아니라 조부모와 선조의 트라우마가 남긴 흔적을 자신의 삶에서 알아차리고, 트라우마를 성장의 자원으로 삼는 법을 알게 될 것이다.
 


부모에게 대물림된 마음은 여러 세대와 그물처럼 얽혀 있다.
그 마음은 편안함과 불편함으로 구분된다.
도덕적 집단양심에 머물때 우리는 평온을 느끼고, 그렇지 않을 때 거리낌을 느낀다.
대물림에 의한 집단양심은 무의식적이기에 인식하기 어렵다.
자녀가 부모와 똑같이 사는 것은 도덕적 집단양심의 작용이다.
자녀는 부모처럼 살 때 도덕적으로 옳고 좋은 사람이 된다고 인식하며 편안함과 귀속감을 느낀다.
반면 부모와 다르게 살 때, 제외될까 하는 두려움과 죄책감을 느낀다.
이것은 무의식적으로 일어난다.
그래서 부모와 똑같이 살려는 집단양심을 통해 가족각본은 후대로 대물림된다.
가족각본이란 드라마 시나리오처럼 관계 패턴, 언어 패턴, 플롯과 결말 등을 만들어가는 생각과 신념과 관점이 담긴 삶의 도식이다.
가족공동체의 해결되지 않은 과제가 후대로 넘어가서 생긴 무의식적 움직임을 알아차려야 한다.
 
후대로 대물림되는 가족의 해결되지 못한 과제는 한 세대가 소화하기 어려운 큰 트라우마가 대부분이다.
부모는 큰 트라우마로 인해 내적으로 심각한 스트레스를 받으며 살아간다.
부모의 무의식적인 긴장은 가정의 분위기를 얼어붙게 한다.
자녀는 살얼음판 같은 가정에서 알 수 없는 스트레스를 받으며 성장한다.
긴장과 스트레스가 누구에게는 질병으로, 정신장애로, 관계의 어려움으로 나타난다.
현상적으로 나타나는 트라우마의 대물림이다.
 


아픔을 치유하고 내적 통찰과 성장을 하는 데 가족세우기가 큰 역할을 했다.
가족세우기는 성공과 행복, 풍요와 여유, 사랑과 존중, 충만과 연결을 촉진하는 프로그램이다.
아무리 어려운 문제를 가지고 있어도 가족세우기를 통해 궁극적인 평온과 사랑의 연결을 경험할 수 있다.
"부모가 정신 차리고 살면 애들은 염려할 것이 없어요"
가족세우기 경험자들은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모두 가족세우기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독재자 등 우리 사회를 휩쓸었던 큰 트라우마가 우리에게 대물림되어 삶을 어떻게 옥죄는지 생생하게 보고 깨닫게 하기 때문이다.
근현대사의 비극은 먼 과거의 선조가 겪었던 옛이야기가 아니다.
바로 우리의 어머니, 아버지, 할머니, 할아버지가 받았던 신체적, 정신적 외상이다.
가족세우기가 삽시간에 전 세계로 퍼진 것은 20세기 아픔과 고통이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지구적으로 일어났기 때문이다.
전세계는 세계대전의 쇼크가 대물림되어 21세기의 불행으로 되풀이되고 있다.
한 세대에서 소화하기 힘든 트라우마는 후대로 내려오기 때문이다.
수 세대가 운명적으로 얽히고설켜 부모, 자식 관계의 아픔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러한 배경을 구조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가족세우기다.
특히 수 세대에 걸쳐 이어지는 고통을 구조적으로 보고 시대적 상황이 부모와 내 운명에 미치는 영향을 인식함으로써, 부모에 대한 갈망을 내려놓고, 존재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과정을 통해 참으로 경이로운 겸손을 배운다.
가족세우기를 알면 누구를 탓하지 않으면서 삶의 뿌리는 단단해지고 인간관계는 성숙해진다.
 
운명적 얽힘은 무의식 영역에서 일어나기에 인식하기 어렵다.
이해하기 힘든 삶의 주제나 가족의 집단행동, 특히 부모의 비정상적인 행동들을 이해하는 데 가족세우기의 도움이 컸다.
나는 가족세우기를 통해 부당한 차별과 서러운 과거를 과거에 두고 물러서서, 지금 여기에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법을 배웠다.
이 태도를 갖기까지 참으로 지난했다.
이제 과거는 과거에 두고 현재의 평화에 있어도 된다고 나 자신을 토닥인다.
가슴의 뻐근함과 목구멍에서의 울렁거림을 자각하면서 내면의 슬픔을 느낀다.
그렇게 나를 애도했다.
과거의 모든 것이 온전했음을 축복하며 마음으로 물러선다.
지금의 내가 있음은 과거가 있기 때문이고, 나는 지금 이대로의 내가 좋다.
이렇게 내 운명에 서서 내 출생과 한계를 받아들인다.
내가 어떻게 살아왔든, 현재 어떻게 살고 있든, 나라는 존재 자체로 의미 있음을 깨달았다.
내가 내 운명에 선 것처럼 동생들도 각자의 운명에서 자기에게 맞게 세상에 봉사하고 있음에 고맙다.
그리고 있는 그대로를 축복한다.
어떤 기대나 의도 없이 더 큰 생명의 차원에서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본다.
조금 멀리 떨어져 있을 때 평화롭기에, 가까이 가지 않는 사랑을 사랑하고 존중한다.
 
가족세우기를 공부하면서 '인간의 삶을 이해하려면 집단 문화가 만든 규범이나 도덕, 정의를 넘어서는 인식이 필요하다'는 것이 가장 인상깊었다.
부모와 자녀가 사랑으로 연결되는 지점은 생명 질서 안에서 가능하다.
나는 부모의 운명에서 물러서는 태도를 견지했다.
"아버지, 당신의 운명에 동의합니다. 당신께서 사신 그대로에 동의합니다. 당신께서 그러하셨기에 저는 지금의 제가 되었습니다. 존재했던 그대로 존재하는 그대로에 동의합니다. 저는 이제 당신에게서 오는 힘을 받습니다. 그리고 제게 필요한 것들을 합니다. 당신은 크시고 저는 작습니다. 고맙습니다."
"당신은 제 할머니의 두 번째 남편입니다. 제 생명과는 관계없지만 그럼에도 제가 잘 되는 것은 모두 당신 덕분입니다. 저를 축복해주세요."
"당신의 재혼을 축하드립니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저는 딸을 너무 사랑합니다. 딸을 안아주고 싶습니다."
내 속에 있던 뭔지 모를 감정의 벽이 와르르 무너졌다.
아버지와의 연결감 회복은 아버지를 향했던 모든 유감을 작고 부차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관계의 어려움이 부모와의 애착 문제에서 왔다고 여겼다.
부모와의 관계가 모든 관계의 원형이기 때문이다.
애착 이론을 공부하며 부모를 재판했다.
마치 부모가 내 인간관계의 어려움을 제공한 원인처럼 생각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부모 역시 나와 유사한 문제를 겪고 있었다.
'우리 어머니 아버지가 나를 잘못 키워서 그래'라고 치부하기에는 부모도 조부모에게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거쳐 내 부모가 되었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었다.
이렇게 부모나 조부모는 공포, 억압, 상실의 시대에 태어나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지난한 인생을 살았다.
이렇게 보면, 우리의 인간관계는 삶의 여러 가지 이슈와 수 세대의 현안들이 복합적으로 중첩되어 내밀하게 얽히고설킨 결과의 한 측면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선대의 처참한 환경에서 오는 트라우마는 무의식과 신경계를 숙주 삼아 후대로 유전되니, 어떤 측면에서 가족은 삶의 원천이면서 동시에 트라우마의 유적지다.
세상의 많은 가정이 평범하고 단란한 가정으로 보이지만, 그 속에 사는 가족원은 밀착관계이거나 단절관계 속에서 고통을 겪는다.
 
우리는 태어날 때 우리 부모의 인생도 시작되었다고 착각한다.
부모에게도 어린 시절이 있었고 부모의 삶에 영향을 주는 많은 것이 있었다는 것을 볼 수 있다면, 우리가 상상하는 대로 부모가 살 수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가족세우기를 통해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부모의 운명에 대해 판단하고 평가하는 사람을 보면 그의 자녀 역시 그가 부모에게 하는 것과 똑같은 행동을 한다는 것이다.
윗대에서 어떤 사건이 벌어졌는지 모르지만, 깊은 원한이 풀리지 않은 채 대물림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나는 내면에서 일어나는 분노의 강렬함이 윗대에서 오는 원한의 힘과 유사함을 체험했다.
어머니의 좌절감이나 딸의 분노는 윗대에서 넘겨받은 느낌이었다.
몸속에 숨겨진 고통이 녹아내리는 통증을 느꼈다.
동시에 고마움과 가벼움도 느꼈다.
나는 운명에 저절로 고개를 숙였다.
기꺼이 받아들이는 태도가 일었다.
"그럼에도 생명의 흐름은 틀린 것이 없었습니다.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이 온전하게 흘렀습니다. 우리는 어머니를 통해 온전한 생명을 받았고 조상들도 다 그렇게 받았습니다. 우리도 부모로서 자녀에게 생명을 줍니다. 모두는 생명에 봉사했습니다. 살아 계신 그대로 생명에 봉사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 마음을 열어 어머니를 통해 온 생명을 넘어 모든 생명이 있게 한 힘을 봅니다. 그리고 어머니 안에 이미 존재하는 그 힘을 동시에 봅니다. 이 힘은 어디에도 없고 오직 어머니 안에서만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운명적 사건이 있었기에 내가 이 땅에 왔으며, 그 생명이 나를 통해 흐르는 것이다.
한동안 깊은 위로를 느꼈다.
나는 가족세우기를 공부하는 내내 부모의 얽힘이 풀리면 자녀도 고통에서 자유로워지는 동시성을 경험했다.
"네 어머니, 당신의 원가족을 향한 당신의 사랑을 사랑하고 존중합니다. 저는 더 이상 관여하지 않습니다. 물러섭니다. 당신은 그렇게 사셔도 저는 아이들과 행복하게 삽니다."
나는 스스로 어머니의 운명에서 물러서는 겸손을 훈련한다.
우리가 자녀로서 부모에게 "당신은 생명을 주시고 저는 생명을 받습니다"의 받아들임을 통과하면 부모를 떠나 다음 관계로 향할 수 있다.
성인기에 발생하는 문제 대부분은 부모와의 관계에서 받아들임이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난다.
두 번째 대표적인 관계는 사랑의 관계다.
이성관계든 동성관계든 다 해당된다.
일반적으로 사랑하는 남녀는 개인적 성향과 각각의 원가족 이슈 등으로 복잡하게 얽힌다.이들이 함께 두 번째 관문을 통과하려면 부모와 배우자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
대부분 상대에게 거는 기대는 자신의 부모에게 받지 못한 사랑이다.
부모를 받아들임이 완성되지 못하면 관계에 어려움이 생긴다.
아내는 남편에게 좋은 아버지를, 남편은 아내에게 좋은 어머니를 갈망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부모와의 관계가 온전하게 완성될 때 비로소 남녀가 행복하게 만날 수 있다.
부모는 주고 자녀는 받는 '주고받기'는 다음 세대를 잇는 '수직적 생명 질서'다.
수직적 생명 질서는 세대를 통해 흐르는 사랑의 질서로써, 부모-자식 관계에서 흐른다.
마치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과 같다.
남녀관계는 본질적으로 서로 없는 것을 동시에 주고받는 수평적 생명 질서를 따른다.
인간관계 역시 주고받음으로 관계를 조절한다.
이 주고받음이 잘 안 되는 사람은 부모와의 주고받음을 완성해야 한다.
 
가족세우기는 갈등관계 속에 숨겨진 사랑을 보여준다.
특히 부모와의 관계는 인간관계의 원형이기에 가족관계가 풀리면 인간관계가 동시에 풀린다.
왕따나 은따, 피해의식이나 죄의식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가족세우기를 통해 관계 역학을 보고 풀어내는 과정에서 새로운 인식이 일어난다.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부모를 부모의 운명에 두고 물러서는 겸손이다.
이 겸손은 부모를 등 뒤에 둠으로써, 우리를 앞으로 가게 하는 힘이다.
 
운명적 얽힘의 대물림은 세 가지로 확인할 수 있다.
공동체 구성원들이 존재하는 그대로 귀속되는지, 각자가 서열에 맞는 자리를 차지하는지, 부모에게서 오는 운명을 판단 없이 받아들이는지를 알아차리는 것이다.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아들을 낳지 못하는 며느리는 죄책감과 열등감에 시달렸다.
훨씬 이전 조선시대 며느리들은 '칠거지악'이라는 규범으로 이혼을 당했다.
칠거지악을 내세워 며느리를 내쫓으면, 누구 하나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던 것은 그 공동체를 결속시켰던 관습이었고, 그 솬습이 구성원들의 도덕적 집단양심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현 시대에는 악습이라고 할 수 있는 비도덕이, 과거 시대에는 너무나 당연한 사회 규범이었고, 모든 사람이 지키는 도덕적 양심이었다.
사회 규범이나 관행 그리고 도덕적 양심은 절대 불변의 진리가 아니라, 시대와 문화에 따라 지속적이고 변화하고 발전하는 사람의 의식일 뿐이다.
 
인생이란 선택과 결정의 연속이다.
결정 장애가 있는 사람들은 사안이 조건과 환경 속에서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를 보지 못한다.
내면에서 현안 해결을 위한 수단과 목적이 얽히고 표면적인 손익 계산을 따져 결정한다.
그러나 영혼은 그 결정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래서 혼란스럽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
가족세우기는 일에 대한 다차원적인 상호작용과 그 전체가 향하는 방향을 보여준다.
결정은 영혼을 이끄는 전체의 움직임과 같은 방향일 때 이해타산을 너는다.
이직이나 진로 결정뿐만 아니라 이혼 같은 큰 결정 앞에서 혼란스러울 때, 가족세우기를 통해 영혼이 움직이는 방향을 볼 수 있다.
현상학적인 방법을 통해 우리는 우리를 이끄는 어떤 힘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가 정상적인 가족의 모습으로 살려면, 가족이 속한 사회가 전쟁이나 폭력이 없는 안전한 생존을 보장해야 한다.
또한 공정한 기회가 주어지고, 차별 등의 억울한 일이 없는 문화가 형성되어야 한다.
부모가 트라우마나 지속적인 스트레스 상황에 노출되면, 자녀의 성장 발달 과정에서 트라우마로 대물림되기 때문이다.
발달 트라우마는 생활 속에서 일어나기에, 가족원이 원하는 것들을 편안하게 표현하고 가볍게 결정할 수 있는 경제적 자유와 서로의 욕구를 알아주고 이해할 수 있는 공감 능력을 지녀야 교과서 나오는 가정을 유지할 수 있다.
가정은 개별 조직이 아니다.
가정은 주변 환경과 사회 변화에 유기적으로 상호작용하는 동시에 부모와 조부모, 증조부모 등 여러 세대의 삶이 한 가정에 대물림되어 만들어지는 생명 역동의 현장이다.
가족세우기는 상상이 아니다.
인생의 실상을 생생하게 인식함으로써 가정과 가족원이 저마다 특별한 삶의 조건과 운명 속에 있음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성장의 자원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돕는다.
 
가족세우기는 양심이 가족관계에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현상적으로 보여준다.
인간의 양심이 내재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결속과 유지를 위해 역사 속에서 만들어진 어떤 것이며, 타인의 시선이라는 사회성을 중심으로 발달하였음을 자명하게 깨닫게 한다.
도덕적 양심은 내면에서 대상을 맞다 틀리다, 좋다 나쁘다로 경계를 짓고 분리한다.
관계 속에 사는 우리는 경계가 분명해야 안정감을 느끼고, 공동체의 경계 안에 귀속되어야 좋은 사람이라는 도덕적 인식을 한다.
 
가족공동체는 자녀와 부모, 조부모, 선조에 이르기까지 사랑의 질서로 상호작용한다.
가족은 고유한 생명성을 가지며 생존 방식을 발전시켰다.
가족 구성원 중 특정인을 제외하여 그 존재가 존중되지 않는다면, 가족 시스템의 유기성이 훼손되어 가족의 관계 질서는 상처를 입는다.
우리의 깊은 무의식은 제외를 곧 죽음으로 여긴다.
이는 선사시대부터 생존을 위해 발달한 원초적 양심이다.
원초적 양심은 부모와 가족공동체에 귀속되고자 하는 본능으로 기능한다.
도덕적 집단양심은 원초적 양심보다 후에 발달했다.
 
가족세우기는 가족공동체를 넘어 운명공동체와 영혼공동체로 확장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집단의 이익을 기준으로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도덕적 집단양심의 경계를 넘어, 존재한 그대로 존중하는 인간의 보편적 가치를 일깨우는 영적양심으로의 변화 과정은 인간의 삶을 깊게 이해할 수 있도록 이끌어준다.
영적양심은 사람을 유기적 질서 안에서 존재하는 것으로 본다.
누구도 제외하지 않는 영혼공동체에서 선대가 겪었던 과거와 개인이 겪었던 고유한 운명은 존엄하게 존중된다.
혈족은 아니지만 운명적으로 얽힌 사람들은 다양하다.
생명과 관계된 사건이나 사람들은 운명적으로 연결되었기에 운명공동체에 귀속된다.
이들의 운명적 얽힘은 언제나 존재했던 그대로에 고개 숙이는 겸손한 태도를 통해 풀어져 나온다.
 


인생각본과 가족각본
 
우리의 타고난 기질이나 천성뿐만 아니라 부모와의 관계, 양육 환경 등에서 만들어진 사고방식이나 행동 습관은 배우가 각본대로 움직이는 것처럼 인생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각본이 된다.
가족공동체 구성원이 각자 고유한 인생각본을 가졌다면, 가족각본은 가족공동체 구성원이 공유하는 삶의 패턴을 말한다.
개인의 인생각본은 귀속된 집단의 각본과 닮아 있다.
예를 들어 가부장 문화를 가진 가정은 남존여비와 남아선호 같은 생각을 가족이 암묵적으로 공유하면서 가족공동체의 생활양식을 발달시킨다.
아들이 아버지처럼 살고 딸이 어머니처럼 사는 것도 가족각본의 대물림이라고 볼 수 있다.
이 가족각본은 자녀의 인생각본에 영향을 미친다.
 
대물림
 
대물림은 부모나 선조에게서 물려받은 행동 패턴이나 정서 패턴 등을 포함하는 생활양식과 삶에 영향을 미치는 무의식 영역을 포함한다.
아들에게서 아버지의 모습이, 딸에게서 어머니의 모습이 나타나듯이, 후대에게 전수되는 삶의 패턴은 무의식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예를 들면 폭력적인 아버지 아래서 자란 아들이 폭력적인 성향을 보인다.
자녀는 생체모방을 통해 부모님에게서 존재 방식을 넘겨받는다.
 
운명적 얽힘
 
선대의 운명과 동일시되어 후대가 선대와 똑같은 정서와 행동 패턴으로 사는 것을 의미한다.
후손은 자신이 선조와 운명적으로 얽혀 있는 것을 보기만 해도 풀림이 일어날 때가 있다.
 
내면의 상
 
양심은 가족에게 실제 적용되는 삶에 대한 내면의 상으로써 생활의 구조와 질적인 측면이 다세대의 상호작용을 통해 대물림된다.
가족은 삶을 인식하는 관점을 내면의 상으로 공유하며, 이것은 가족문화가 된다.
가족이 공유하는 내면의 상은 가족각본이 되어 같은 방식으로 삶의 현안을 해석하고 인식하는 양심으로 발달한다.
이러한 내면의 상은 가족관계를 포함하여 모든 관계에 영향을 미친다.
 
...
 
받아들임은 부모와의 관계에서 핵심 주제다.
생명은 우리 조상과 부모를 통해 내게로 왔다.
가장 아랫자리에서 우리에게 오는 생명을 받아들이고 다음 세대로 넘겨주어야 한다.
누군가의 불행으로 내가 행운을 얻었다면, 이 또한 고개 숙이면서 받아들여야 한다.
내가 잘 되는 것으로 그 불행이 헛되지 않게 하는 것이 진정한 받아들임이기 때문이다.
 
파파걸은 애인은 많으나 배우자는 없다.
심리적 관계에서 남편 자리에 아버지가 있기에 만나는 남자들에게서 아버지의 모습을 찾는다.
아버지에게서 오는 조건 없는 사랑을 기대하지만, 만나는 남자는 아버지가 아니다.
그래서 파파걸은 연애와 결혼에 실패한다.
아이러니하게도 파파걸은 마마보이와 커플이 된다.
둘 사이에 뫼비우스의 때처럼 역기능적인 이성관계의 얽힘이 일어난다.
파파걸과 마마보이는 이성이 아니더라도 쇼핑이나 여행, 명상이나 학문, 취미생활 등에 중독된다.
파파걸의 남자 자리를 아버지가, 마마보이의 여자 자리를 어머니가 차지하는 것을 심리적 치환이라고 한다.
마마보이나 파파걸은 부모의 갈등에 끼어들어 삼각관계 구도를 만든다.
이러한 삼각관계에서 자녀는 자신이 생각하기에 약하다고 판단되는 부모 편에 선다.
 
...
 
상대에게 가장 좋은 선물은 상대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존경하는 것이다.
그러나 대다수 사람은 상대가 변하면 존경하겠다고 말한다.
이런 말은 관계를 회복시키지 못한다.
상대가 변해야 한다고 요구하면, 상대는 자신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옳다.
강요하지 않는다면 각자는 충분히 성장할 수 있다.
 
...
 
부모가 자녀를 조건 없이 사랑하고 돌보면, 자녀는 부모로부터 받은 생명과 사랑을 자신의 자녀를 돌보는 일로 세상에 기여한다.
자녀가 부모의 운명에서 물러나 스스로 서기를 바란다면, 부모 역시 자신의 부모와의 관계에서 자녀로서 "당신은 주시고 저는 받습니다. 당신은 크시고 저는 작습니다"가 되어야 한다.
모든 자녀는 부모가 사는 방식대로 살려고 하기 때문이다.
자녀가 부모처럼 살려는 것은 부모와 유대감을 가지고 가족공동체에 귀속되려는 무의식적인 양심의 기능이다.
 


치유를 위한 언어
 
세우기 언어는 관계의 뿌리를 회복하고, 내면의 얽힘을 풀어주며, 내적 성장을 돕는다.
또한 부모와 조상에게서 넘겨받은 부차적 느낌을 녹인다.
사랑의 언어를 사용하면 얽히고설켜 도저히 풀릴 것 같지 않은 갈등을 풀 수 있다.
세우기 언어를 천천히 소리 내어 말하기, 어떤 감정이나 감각, 이미지나 생각, 기억들이 올라오는지 알아차리기가 가장 중요하다.
이 과정이 잘 진행되면 심리적 갈등을 사랑으로 녹여 흘려보내는 마법을 경험할 것이다.
사랑의 언어는 신경계를 잡고 있는 트라우마와 불필요한 상념을 녹여주는 생명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부모를 향한 사랑의 언어
 
사랑하고 존경하는 어머니(아버지).
당신은 크시고 저는 작습니다.
당신은 주시고 저는 받습니다.
당신은 당신인 그대로 제 어머니(아버지)입니다.
당신께서 그러하시기에 저는 지금의 제가 되었습니다.
이제, 당신은 저에게서 자유롭습니다.
당신에게서 오는 힘으로 저는 어떤 것을 합니다.
고맙습니다.
 
부모에게 투사하는 모든 것을 지구의 중심으로 흘려보낸다.
부모에 대한 모든 유감을 내려놓고 떠나보내는 상상을 한다.
부모가 우리에게서 자유로워지면 우리도 부모에게서 자유로워진다.
 
자녀를 향한 사랑의 언어
 
사랑하는 딸아, 아들아.
너는 우리들의 기쁨이다.
네가 무엇을 하든 어떤 선택을 하든 모든 것은 옳구나.
네가 어떤 삶을 살든 어떤 결정을 하든 나는 너를 응원한다.
네가 나를 떠나 너의 삶으로 가면 내가 기쁘겠다.
 
형제를 향한 사랑의 언어
 
질병이나 사고 등으로 일찍 죽은 형제에게: 먼저 갔어도 언제나 내 형제야. 나는 여기서 조금 더 살다가 너에게 갈게.
어릴적 돌봐준 형제에게: 저는 압니다. 당신이 제게 무엇을 선물했는지를. 저는 그것을 귀하게 받습니다. 고맙습니다.
불행하게 사는 형제에게: 당신의 운명을 존중합니다. 제가 다르게 살 수 없는 것처럼 당신도 다르게 살 수 없음을 압니다. 제가 잘 사는 것은 당신 덕분입니다.
 
인간관계를 향한 사랑의 언어
 
당신의 모든 행동으로 좋은 것을 이루면 저는 거기에 동의합니다.
나는 당신에게 그렇게 중요한 사람이 아닙니다.
내가 옳은 것처럼 당신도 옳습니다.
저는 제 자리에 맞습니다. 
당신은 당신 자리에 맞습니다.
 
출처: <트라우마 대물림을 치유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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