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옳다>

2023. 5. 5. 08:47Book

728x90
반응형
BIG

1장 

 

#1

 

스타란 너(대중)의 취향에 나를 온전히 맞추는 사람만이 살아남는 생태계에서 최종적으로 살아남은 생존자다. 

나를 너에게 맞추는 촉이 고도로 발달한 사람만이 도달할 수 있는 경지다.

다르게 표현하면 스타가 누리는 지위와 힘은 빼어난 재능과 고도의 촉을 바탕으로 자기 소멸의 경지에 다다른 이가 누리는 화려한 보상이다.

그게 스타의 본질이다.

일시적으로 그런 삶에서 벗어날 수는 있지만 스타라면 그런 삶에서 지속적으로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스타는 화려하게 시든 꽃 같다.

스타가 가장 완벽하게 빛나는 순간은 나를 너에게 완벽하게 맞추었을 때다.

내가 온전히 '너의 욕망 그 자체'일 때, 내가 '나'를 주장하지 않을 때, '나'가 사라졌을 때다.

'나'를 주장하는 모습이 가능할 때도 있다.

만원 안에서 물쓰듯 써도 좋다는 호의처럼 '너'가 '자기 주장을 하는 나'를 근사하게 바라봐주는 범위에 한해서다.

온전히 '나'이려고 하면 스타의 자격은 몰수당한다.

스타로서의 수명은 그것으로 끝난다.

최소한 그 생태계에서는 추방된다.

'너'의 욕망에 반(反)하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스타의 삶은 우리 삶의 완전한 축소판이다.

일상에서 누군가의 기대와 욕구에 맞춰 끊임없이 나를 지워간다는 측면에서도 그렇고, 자기 소멸의 벼랑 끝에서 SOS를 치는 삶을 살고 있다는 측면에서도 그렇다.

 

사람은 나를 그대로 드러내는 사람에게 끌린다.

사람이 가장 매력적인 순간은 거침없이 나를 표현할 때다.

모든 아기가 아름다운 것도 그 때문이다.

스타로서의 성공도 매력적인 나일 때, 독특한 내 스타일을 그대로 드러낼 때 가능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너의 욕망에 완벽하게 맞춰 움직이는 나로 살아갈 때만 가능하다.

스타는 어느 순간 자신이 가진 막대한 자산이 전부 너의 이름으로 되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스타는 계속적으로 '너'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나'의 욕구이고 '내 삶'이라고 합리화할 수 있어야 한다.

스타가 아니더라도 부모나 배우자의 강력한 기대에 부응하는 것 자체를 자기 삶으로 받아들이며 사는 사람들, 주어진 역할에 헌신하는 것이 자기 삶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고 살아가는 사람의 삶은 스타들이 겪는 공황장애 삶의 원리와 매우 닮아 있다.

나와 내 옆에 있는 사람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우리 삶의 풍경이다.

자기성이 소거된 채 부모의 기대나 사회적 역할, 가치 등에 전적으로 기대어 살아가던 사람은 절대적 의존 대상이던 그 부모나 배우자와 이별하거나 절대적인 내 역할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던 일이 없어지거나 그 가치가 빛을 잃을 때 공황발작을 경험할 수 있다.

공황발작은 곧 심장이 멎어버릴 것 같지만 자기 소멸의 끝에서 탈진한 사람이 스스로 자기 삶을 거둬들이는 경우는 꽤 있다.

심장이 약해서 죽는 것이 아니라 나를 지워가며 살던 삶의 끝자락에서 더없이 기진맥진해져서 생 전체에서 마침내 손을 놓아버리게 되는 것이다.

누구든 내 삶이 나와 멀어질수록 위험해진다.

 

#2

 

우리 사회에는 노인을 바라보는 양극단의 시선이 있다.

한 축은 노인에 대한 폄하다. 

노인을 현실 감각을 잃어버린 분별력 없는 사람으로 본다.

다른 한 축은 노인에 대한 영혼 없는 습관적 존중이다.

노인이란 삶의 경험이나 지혜가 있다고 관성적으로 말한다.

두 가지 관점 모두 노인을 생생한 존재, 개별적 존재로 보지 않는다는 점에서 똑같이 불편하고 부정확하다.

모든 아이가 다 다르듯 모든 노인도 당연히 다 다르다.

개별적 존재들이다.

그런데 상대적으로 젊은 사람들은 노인을 노인이라는 집단적 정체성이 전부인 존재로 바라본다.

노인이 아닌 어느 누구에게라도 그런 시선은 그 존재에 대한 폭력이다.

 

자기 존재가 집중받고 주목받은 사람은 설명할 수 없는 안정감을 확보한다.

그 안정감 속에서야 비로소 사람은 합리적인 사고가 가능하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정확한 한 지점이 있다.

그걸 알면 사람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

그 지점이 바로 한 개별적 존재로서 그 사람의 고유한 '자기'다.

사람은 자기에 공감해 주는 사람에게 반드시 반응한다.

사람은 본래 그런 존재다.

노인만 그런 게 아니다.

학교나 부모에게 주목받지 못하는 청소년들, 좋은 대학을 못 다니고 변변한 직장이 없다는 이유로 형제나 또래 중에서 제대로 눈길 한번 받지 못하는 청년들의 삶도 한 개별적 존재로서 인정받고 주목받지 못한다는 점에선 노인의 삶과 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자기 존재에 주목을 받은 이후부터가 제대로 된 내 삶의 시작이다.

거기서부터 건강한 일상이 시작된다.

 

#3

 

내가 여기서 말하는 '당신이 옳다'는 말은 그런 현실적 수준의 잘잘못이 아닌 더 근원적 차원에서의 명제다.

'분명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라는 이해다.

A에 대한 무조건적인 믿음과 지지다. 

그 말은 A를 절대적으로 안심하게 해준다.

내가 잘못되지 않았다는 확인이 있어야 사람은 그 다음 발길을 어디로 옮길지 생각할 수 있다.

자기에 대해 안심해야 그 다음에 대해 합리적으로 사고할 수 있다.

네가 그럴 때는 분명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말은 '너는 항상 옳다'는 말의 본 뜻이다.

그것은 확실한 '내 편 인증'이다.

이것이 심리적 생명줄을 유지하기 위해 사람에게 꼭 필요한 산소 공급이다.

 

사람은 상대가 하는 말의 내용 자체를 메시지의 전부라고 인식하지 않는다.

순간적으로 그 말이 내포한 정서와 전제를 더 근원적인 메시지로 파악하고 받아들인다.

'너는 옳다'고 해주면 A는 찌질하게 구는 나를 비난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사람의 존재를 통해서 자기 존재에 대해 안심하게 된다.

가장 절박하고 힘이 부치는 순간에 사람에게 필요한 건 '네가 그랬다면 뭔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너는 옳다'는 자기 존재 자체에 대한 수용이다.

 

2장

 

#1

 

우리 사회는 이미 사람을 유령처럼, 그림자처럼 대하는 것이 사회의 시스템으로 굳어진 느낌이다.

처음에는 약자와 빈자만이 이런 비정한 시스템의 희생양일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젠 아니다.

사람을 존재 자체로 주목하고 인정하지 않는 공기는 미세먼지처럼 우리 사회 전체를 조용히 덮어버리는 중이다.

이제는 부자나 권력가들도 미세먼지처럼 휘감는 그 공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내 직장이나 학위, 직업이 '나'가 아니듯 내 돈, 권력, 외모나 재능도 당연히 '나' 자체가 아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다 가진 사람도 자기 존재 자체가 주목을 받지 못하면 심한 결핍이 생긴다.

오히려 더 배를 곯는다.

외형적으론 가진 게 많으니 존재 자체의 결핍으로 인한 그들의 불안과 두려움을 말도 안되는 투정, 배부른 투정 같은 것으로 치부해서다.

나중에 심리적으로 더 큰 곤경에 빠지고 그 대가를 치르게 된다.

역설적으로 자기 존재에 대한 영역에서 인간은 공평하게 허기지다.

존재에 대한 주목이 삶의 핵심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질주하다 보면 현실에선 아무 쓸모도 없는데 사이버 세상에선 떼부자인 다 가진 자처럼 되기 십상이다.

 

고급 정장에 계급장이나 보석을 주렁주렁 달고 있을 때 나를 주목하고 인정해 준 사람보다 내가 맨몸이었을 때 나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극진히 보살펴 준 사람은 뼛속에 각인된다.

내 존재 자체에 반응한 사람이니 그 사람만이 내 삶에 의미 있는 사람이 된다.

약간의 상황적 오해와 착시가 있다 해도 마음의 영역에서 그것은 명백한 진실이다.

그런 사람을 만나야만 사람은 존재의 근원적인 외로움에서 벗어나고 존재의 근원적 불안에서 자유로워진다.

그래야 살아갈 힘의 최소한의 안정 기반을 만들 수 있다.

 

#2

 

질병이 아닌 일상의 영역에선 사람에 대한 자연스럽고 상식적인 반응이 때로 가장 효과적인 치유다.

그것이 사람 마음에 더 빠르게 스미고 와 닿는다.

그런 일의 위력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탁월한 치유자가 된다.

어떤 고통을 당한 사람에게라도 그 고통스러운 마음에 눈을 맞추고 그의 마음이 어떤지 피하고 물어봐줄 수 있고, 그걸 들으면서 이해하고, 이해되는 만큼만 공감해 줄 수 있다면 그것이 가장 도움이 되는 도움이다.

 

사람들은 누가 죽고 싶다는 말을 했을 때 그 마음에 대해 자세히 묻는 것은 상대에게 상처를 주는 행위라 여긴다.

아니다. 정반대다.

고통 속에 있는 사람이 가장 절박하게 원하는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다.

심각한 내 고통을 드러냈을 때 바로 그 마음과 바로 그 상황에 깊이 주목하고 물어봐 준다면 위로와 치유는 이미 시작된다.

무엇을 묻느냐가 아니고 나에게 집중하고 나의 마음을 궁금해하는 사람이 존재하는 것 자체가 치유이기 때문이다.

그 행위만으로도 전문가를 만나기 전까지 그를 적극 지켜줄 수 있다.

어떤 경우엔 그 개입만으로도 전문가 없이 내내 목숨을 버리지 않는 경우도 있다.

 

#3

 

인간의 마음이나 감정은 날씨 같다.

이 움직임과 변화 모두 지구와 대기의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감정도 그렇다.

그러므로 우울은 질병이 아닌 삶의 보편적 바탕색이다.

 

나를 순정하게 만나게 해주는 곳이 'Real World'다.

'나도 그렇구나' 하는 것을 느끼면서 삶에 대한 현실 감각이 조금씩 돌아온다.

처음으로 가족들이 실감나게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내가 누구인지, 그들에게 내가 어떤 존재였는지, 그간 내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그들이 나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처음으로 감각한다.

절름발이 같은 도구적 삶에서 벗어나 드디어 '나'와 만난다.

삶의 축복이다.

이 과정의 심리적 발판이 무력감과 우울이라는 감정이다.

그 감정을 도움판으로 해서 깨달음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의 무력감은 빛나기만 했던 자신의 삶이 사실은 반쪽짜리에 불과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

생각과 판단이 자신을 그렇게까지 감지하지 못했을 때조차 감정은 자신의 나머지 반쪽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드러낸다.

 

우울은 극복의 대상이 아니다.

우울이라는 내 삶의 파도에 리듬을 맞춰 나도 함께 파도에 올라타야 할 타이밍이다.

 

#4

 

존재 자체만으로 자신에게 주목해주는 사람이 한 명은 있어야 사람은 살 수 있다.

생존의 최소 조건이다.

이해관계 없이도 무조건 나를 사랑하고 지지해 주는 가족 같은 관계, 최소한 나를 의식이라도 하는 사람이 세상에 반드시 존재해야 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5

 

심리적 CPR은 '나'라는 존재 자체에만 집중해야 한다.

'나'가 아닌 많은 것들을 젖히고 '나'라는 존재 바로 그 위를 강하게 자극하는 것이다.

감정이 항상 옳다.

'나'라는 존재의 핵심이 위치한 곳은 내 감정, 내 느낌이므로 '나'의 안녕에 대한 판단은 거기에 준해서 할 때 정확하다.

심리적 CPR이 필요한 상황인지 아닌지도 감정에 따라야 마땅하다.

"요즘 마음이 어떠냐"

그의 존재 자체, 그중에서도 존재의 핵심인 감정에 대한 주목과 안부를 묻는 질문이었다.

그것이 심리적 CPR을 행할 정확한 위치이다.

대상 이야기보다 대상에 대한 나의 느낌이 더 나에 대한 이야기에 가깝다.

내 상처가 '나'가 아니라 내 상처에 대한 나의 느낌과 태도가 더 '나'라는 말이다.

내 느낌이나 감정은 내 존재로 들어가는 문이다.

느낌을 통해 사람은 진솔한 자기 존재를 만날 수 있다.

느낌을 통해 사람은 자기 존재에 더 밀착할 수 있다.

'나'가 또렷해져야 그 다음부터 비로소 내 삶을 살아갈 수 있다.

 

내 고통에 진심으로 눈을 포개고 듣고 또 듣는 사람, 내 존재에 집중해서 묻고 또 물어주는 사람, 대답을 채근하지 않고 먹먹하게 기다려주는 사람이면 누구라도 상관없다.

그 사람이 누구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그렇게 해주는 사람이 중요한 사람이다.

그 '한 사람'이 있으면 사람은 산다.

자기에게 소중한 사람을 지켜야 자기도 살 수 있다.

한 사람의 힘이 그렇게 강력한 것은 한 사람이 한 우주라서 그럴 것이다.

근사한 수식이나 관념적인 언어가 아니라 마음에 관한 신비한 팩트다.

사람은 그 '한 사람'이라는 존재의 개별성 끝에서 보편성을 획득한다.

그러므로 한 사람은 세상의 전부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한 사람이고 한 세상이다.

그래서 누구든 결정적인 치유자가 될 수 있다.

 

3장

 

#1

 

결론부터 말하자.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 상처 입은 마음을 치유하는 힘 중 가장 강력하고 실용적인 힘이 공감이다.

공감이라는 심리적 무기를 가질 수 있으면 사는 일이 홀가분해진다.

사람 관계에서 불필요한 에너지 소모를 대폭 줄일 수 있다.

 

공감은 상대를 공감하는 과정에서 자기의 깊은 감정도 함께 자극되는 일이다.

이렇듯 상대에게 공감하는 도중에 내 존재의 한 조각이 자극받으면 상대에게 공감하는 일보다 내 상처에 먼저 집중하고 주목해야 한다.

스스로에게 따스하게 물어줘야 한다.

언제나 나를 놓쳐서는 안 된다.

언제나 내가 먼저다.

그게 공감의 중요한 성공 비결이다.

너를 공감하는 일보다 더 어려운 것이 나에게 집중하고 나를 공감하는 일이다.

공감은 내 등골을 빼가며 누군가를 부축하는 일이 아니다.

그 방식으론 상대를 끝까지 부축해 낼 수 없다.

공감은 너를 공감하기 위해 나를 소홀히 하거나 억압하지 않아야 이루어지는 일이다.

너를 공감하다 보면 내 상처가 드러나서 아프기도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나도 공감받고 나도 치유받을 수 있는 기회가 된다.

공감하는 사람이 받게 되는 특별한 선물이다.

 

#2

 

자세히 알아야 이해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어야 공감할 수 있다.

감정적 반응 그 자체가 공감은 아니다.

한 존재가 또다른 존재가 처한 상황과 상처에 대해 알고 이해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그 존재 자체에 대해 갖게 되는 통합적 정서와 사려 깊은 이해의 어울림이 공감이다.

그러므로 공감은 타고난 감각이나 능력이 아니다.

학습이 필요한 일이다.

 

악의가 없이도 얼마든지 타인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

그래서 공감은 배워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야 최소한 고통을 겪는 사람에게 의도치 않게 상처를 주지 않을 수 있다.

공감은 다정한 시선으로 사람 마음을 구석구석, 찬찬히, 환하게 볼 수 있을 때 닿을 수 있는 어떤 상태다.

상황을, 그 사람을 더 자세히 알면 알수록 상대를 더 이해하게 되고 더 많이 이해할수록 공감은 깊어진다.

그래서 공감은 타고나는 성품이 아니라 내 걸음으로 한발 한발 내딛으며 얻게 되는 무언가이다.

 

누군가 자기 속마음을 꺼낼 때 그의 상황을 구석구석 잘 볼 수 있도록 거울처럼 비춰주면 상황은 빠르게 파악되고 이해된다.

이해가 되면 그에 합당한 감정과 공감이 절로 일어난다.

또 그것을 말하는 이에겐 자신을 소중하게 대하는 사람의 눈길을 확인하는 과정이다.

그의 마음을 구석구석 비춰주는 것은 그의 존재 자체에 집중하고 주목하고 있다는 의미다.

그 행위 자체가 다정한 공감이고 치유다.

 

잘 모르면 우선 찬찬히 물어야 한다.

내가 모르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시작되는 과정이 공감이다.

제대로 알고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조심스럽게 물어야 공감할 수 있다.

그래서 공감은 가장 입체적이고 총체적인 파악인 동시에 상대에 대한 이해이고 앎이다.

 

#3

 

공감은 그저 들어주는 것, 인내심을 가지고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듣는 일이다.

정확하게라는 말은 대화의 과녁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뜻이다.

'자기' '존재' '존재성'에 눈을 맞추는 것이 공감이다.

 

#4

 

공감은 좋은 말 대잔치나 칭찬의 립서비스가 아니다.

그렇다고 늘 옳은 말 같은 비판을 잊지 않아야 한다는 게 아니다.

공감은 상대에게 전하는 말의 내용 자체가 따듯한가 아닌가가 핵심이 아니라 그 말이 궁극적으로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그 말이 어디에 내려앉는 말인지가 더 중요하다.

상대방의 존재 자체를 향하고, 존재 자체에 내려앉는 말이 공감이다.

공감은 그저 좋아 보이는 외형에 대한 지지와 격려의 반응이 본질이 아니다.

존재 자체에 대한 주목이어야 하고 그럴 때만이 그 위력이 오롯이 나타난다.

 

외형적 성과나 성취 자체에 대한 과도한 방점은 사람에게 성과에 대한 불안과 강박을 가져오지만 존재 자체에 대한 집중은 안정과 평화를 준다.

부작용이 없다.

존재 자체에 대한 주목과 공감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자신의 성취에 대한 인정과 주목을 존재에 대한 주목이라고 생각해서 그것에 매달리게 된다.

공감은 그것을 가능하게 한 그 사람 자체, 그의 애쓴 시간이나 마음씀에 대한 반응이다.

그럴 때 사람은 자신이 진정으로 인정받고 보상받았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런 경험을 반복적으로 하면 사람은 그런 외형에 덜 휘둘리며 상 수 있게 된다.

공감은 그가 고요하게 가만히 있어도, 특별히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자기 자신만으로도 초조하지 않을 수 있는 안정감의 형태로 나타난다.

공감의 힘은 입체적이다.

 

#5

 

사람의 속마음은 무의식적 욕구나 욕망뿐 아니라 살아오며 겪었던 상처와 그 감정들, 미처 떠올리지 못했던 오래된 기억들이 빼곡하게 모여 있는 캄캄한 곳이다.

더구나 속마음은 그걸 보호하는 방어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벽의 다른 이름은 방어기제다.

그 벽은 속마음을 보호하는 역할도 하지만 과도한 방어는 오래된 상처들을 가둔 채 곪게 만들기도 한다.

치유란 속마음을 보호하는 동시에 농이 가득찬 속마음을 드러내는 일이다.

모순되는 그 일을 마법처럼 해내는 것이 공감이다.

 

존재 자체에 집중하고 주목하면 벽을 더듬던 손이 문을 만난다.

존재 자체가 속마음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존재에 주목하고 집중할 때 문이 반응한다.

문이 존재 자체라면 문고리는 존재의 '감정이나 느낌'이다.

공감은 그 문고리를 돌리는 힘이다.

 

존재 자체의 느낌이 만져지면 사람은 움직인다.

벽을 뚫고 부수지 않아도 문을 찾고 문고리를 돌리면 금세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존재의 느낌에 정확하게 내려앉는 공감은 세상의 어떤 훌륭한 설득이나 계몽, 조언, 심지어 어떤 강력한 항우울제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마음을 돌려놓는다.

 

존재 자체와 존재가 느꼈던 감정과 느낌에만 주목해서 묻고 얘기하고 공감하는 경험을 한 것일 뿐, 어느 누구도 해석하고 분석해 준 일이 없는데도 자신에게 필요한 맞춤 처방을 스스로 알아서 찾아낸다.

똑같은 시간 중에 상호 모순되는 여러 깨달음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나온다.

자기 존재와 그 느낌을 만나고 공감받은 사람은 특별한 가르침이 없어도 자신에게 필요한 깨달음과 길을 알아서 찾게 된다.

 

#6

 

상처를 다 드러내고 살 수가 있을까.

그럴 수도 없고 그럴 필요까진 없다.

 

현실에서 벌어지는 일상적 고통에서 자유로워지려면 우선 그 상황과 관계 속에서 당사자 자신이 느끼는 자기 속마음에 대해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것이 중요하다.

치유란 상처 입은 자기 마음결을 누군가의 손을 잡고 하나하나 보고 만지고 확인하고 느끼며 분리해 가는 과정이다.

그 과정을 통해 자신의 뒤엉켜 있던 마음결을 안개가 걷힌 후의 풍경 보듯 하나씩 또렷이 보는 일이다.

'아, 그때 내 마음이 그랬었구나. 그래서 그 사람에게 그런 말이 나왔던 거구나. 내가 그랬구나. 그래서 내가 그런 행동을 했던 거구나.'

그렇게 자신과 자기 상황을 제대로 조망할 수 있을 때까지 묻고 공감하고 또 묻고 다시 공감해 주는 일을 반복해 주는 것이 옆에 있는 공감자가 해야 하는 일이다.

상처와 혼돈 속에 있는 사람에게 길 건너에서 전문적이고 일방적인 답을 전해주는 사람은 공감자가 아니다.

사람 마음은 외부에서 이식된 답으로는 절대 정돈되지 않는다.

답은 밖에서 오지 않고 언제나 내 안에서 발견돼야 내게 스미고 적용된다.

자기가 처한 상황의 실체, 자기 마음의 실체를 하나하나 또렷이 보고 느끼면서 자기 상황에 대한 심리적 조망권을 확보해야만 마음이 정돈되기 시작한다.

온몸, 온 마음으로 느끼는 것이 진짜 아는 일이며 그렇게 알아야만 혼돈에서 벗어날 길이 보인다.

 

현재의 감정이 공감받지 못하면 과거의 상처를 꺼낼 수 없다.

지금 여기의 감정이 공감받지 못하면 그다음 이야기로 넘어갈 힘이 생기지 않는다.

그의 현재 감정이 공감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공감은 보이지 않는 고비들을 계속 넘어갈 수 있게 해주는 힘이다.

그에 기대어 자기 속마음으로 들어가 숨어 있던 자기를 만날 수 있다.

그에 기대어 자기의 전모에 대한 조망권도 확보할 수 있게 된다.

그의 불안에 충분히 눈을 맞춰줘야 한다.

내가 현재 느끼고 있는 불안을 알아준다는 건 내 존재 자체에 초집중하고 주목하고 있는 사람이란 뜻이다.

내 존재를 조건 없이 그대로 다 수용해 주는 사람이란 것이다.

그런 사람을 만났다는 느낌이 들어야 사람은 비로소 안전하다는 느낌을 갖는다.

그래야 자기 상처를 충분히 드러낼 수 있다.

자기 불안을 내려놓고 더 깊은 자기 이야기로 들어갈 수 있다.

 

사람은 단세포가 아니라서 어떤 경우든 복잡다단한 감정이 당연하다.

대상에 대한 상반된 양극단의 감정은 대상의 삶에 대한 그의 입체적인 반응이다.

서로 모순되더라도 그의 감정은 모두 옳다.

 

공감을 바탕으로 도달한 자기에 대한 입체적인 이해는 사람을 자유롭게 한다.

자기 존재가 온전히 받아들여지면서 자기의 느낌이 정돈되면 모든 게 자연스러워진다.

고름이 꽉 찬 상처에서 고름을 빼내듯 그는 공감 속에서 아픈 이야기들을 죽죽 끌어냈다.

고름을 빼낸 자리에 새살이 돋듯 그는 자기 상처 이야기를 하며 새살 같은 건강성을 되찾기 시작했다.

아팠던 이야기를 꺼내면서 느끼는 통증은 회복중의 통증이다.

그래서 아파도 계속 말할 수 있다.

공감은 상처를 더 드러낼 수 있게 만들고 제대로 드러난 상처 위에서 녹아드는 연고다.

 

#8

 

공감자는 모든 사람과 원만하게 지내는 사람이 아니다.

너도 마음이 있지만 나도 마음이 있다는 점, 너와 나는 동시에 존중받고 공감받아야 마땅한 개별적 존재라는 사실을 안다면 관계를 끊을 수 있는 힘도 공감적 관계의 중요한 한 축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관계를 끊는 것이 너와 나를 동시에 보호하는 불가피한 선택일 때가 있기 때문이다.

 

4장

 

#1

 

사람도 국가처럼 각각 모두 고유하고 개별적인 존재들이다.

나는 나 아닌 다른 사람과 전혀 다른 개인의 역사를 가진다.

성격과 기질도 다르다.

국경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경계가 존재한다.

모든 인간이 개별적인 존재라는 것은 나와 너 사이에 둘을 구분하는 경계가 있다는 걸 의미한다.

경계를 인지할 수 있어야만 나도 지키고 상대방을 침범하지 않을 수 있다.

공감을 주고 받는 일에서도 똑같은 원리가 적용된다.

나와 너의 관계에서 어디까지가 '나'이고 어디부터가 '너'인지 경계를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경계에 대한 인식이 있어야 공감에 대한 정확성이 높아진다.

 

사람이 개별적이고 독립적이라는 말은 사람은 자기가 처한 상황과 관계의 변화에 따라 주체적으로 끊임없이 적응해 가는 존재라는 의미다.

노인이나 어린아이, 성인 누구나 마찬가지다.

모든 존재는 존재 자체로 독립적이고 온전한 심리적 메커니즘을 가진다.

딸의 남자친구가 맘에 안 들어도 그 남자가 딸의 남편이 되고 자신의 사위가 되면 그 관계에 맞춰 사람의 마음과 판단은 또 달라진다.

달라진 상황에 의해 영향을 받고 적응해서다.

적응은 인간의 본능이다.

끝내 적응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로 인한 불행감은 엄마 스스로 감당해야 할 몫이다.

사위에 대한 탐탁지 않은 엄마의 감정은 딸이 해결해 줘야 할 과제가 아니다.

그럴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그것은 엄마 자신이 해결해야 할 엄마의 숙제다.

딸의 경계 바깥에서 벌어지는 엄마 영역 안의 엄마 과제다.

그런 경계를 분명히 자각하고 엄마의 몫으로 돌려줘야 엄마의 감정도 딸이 개입할 때보다 더 빠르게 수습된다.

 

#2

 

누군가에게 공감자가 되려는 사람은 동시에 자신의 상처도 공감받을 수 있어야 한다.

공감하는 일의 전제는 공감받는 일이다.

자전하며 동시에 공전하는 지구처럼 공감은 다른 사람에게 집중하는 동시에 자기도 주목받고 공감받는 행위다.

타인을 구심점으로 오롯이 집중하지만 동시에 자기 중심을 한순간도 놓치지 않아야 가능하다.

공감은 본래 상호적이고 동시적인 것이다.

공감자와 상처 입은 사람이 따로 있지 않다.

둘 다 본질적으로는 상처 입은 인간이다.

공감은 상대를 공감 '해주는' 일이 아니다.

공감은 너도 살리고 나도 구한다.

그래서 공감은 치유의 온전한 결정체다.

이 온전함의 토대는 오로지 자기 보호에 대한 감각에서 시작되고 유지되며 자기 보호는 자기 경계에 대한 민감성에서 시작된다.

 

#3

 

상대방의 모든 것을 다 품고 공감할 수 있다고 했을 때 그 모든 것이란 상대방 존재 자체와 그 존재의 마음이다.

화가 난 마음은 공감받을 수 있지만 그로 인해 폭력적 행동을 했다면 그 행동은 공감의 대상이 아니며 그에 대한 책임은 온전히 당사자의 몫인 것이다.

두 사안은 별개다.

그렇게 엄마는 아들의 마음을 전적으로 공감하면서도 엄마 자신의 경계를 아이에게 분명히 그어줘야 한다.

부모 자식 간에만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다.

배우자나 연인, 친구 사이에서도 흔한 일이다.

'헌신성'이란 덕목은 의외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경계를 쉽게, 소리 없이 허문다.

 

#4

 

경계란 개념은 이상향이 아니라 구체적이며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것이다.

사회 관계에서는 너와 나를 갑과 을로 나눌지 모르지만, 심리적으로 모든 사람은 갑 대 갑이다.

갑과 을 같은 사회적 관계로 너와 나의 관계 전체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만 인지할 수 있어도 갑을 관계를 갑갑의 관계로 바꿀 수 있다.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은 그 관계가 기쁨과 즐거움이거나 배움과 성숙, 성찰의 기회일 때다.

그것이 관계의 본질이다.

끊임없는 자기 학대와 자기혐오로 채워진 관계에서 배움과 성숙은 불가능하다.

주변을 찬찬히 돌아보면 끊어야만 자기를 지킬 수 있는 관계들이 의외로 많다.

관계를 끊으면 그때서야 상대방도 자기를 돌아볼 수 있는 최소한의 계기가 만들어진다.

그런 계기로 삼지 못해서 결국 대가를 치르게 되어도 그건 그의 몫이다.

 

5장

 

#2

 

감정은 좋고 나쁘고, 옳고 그르고의 이분법으로 판단할 대상이 아니다.

감정은 한 존재의 지금 상태를 있는 그대로 나타내는 바로미터다.

내 존재의 상태를 시시각각으로 반영하는 신호다.

모든 감정에는 이유가 있고 그래서 모든 감정은 옳다.

불안 신호를 따라 '나'를 점검해 봐야 한다.

불안을 따라가다 보면 근원이 나오고 그러면 근원적인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

좋은 감정이든 나쁜 감정이든 모든 감정은 옳다.

모든 감정은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한다.

 

#3

 

사랑과 인정에 대한 욕구를 더 압축해서 말하면 '사랑에 대한 욕구'다.

인정 욕구는 사랑 욕구의 유아기 이후 또하나의 변주다.

사랑 욕구는 아기 때부터 시작해서 늙어서 숨이 멎기 직전까지 인간이 한결같이 갈망하는 것이다.

예외가 없다.

욕구의 표현 방식이 세련되어지거나 욕구 충족 대상이 달라질 수 있지만 총량 자체는 줄지 않는다.

줄어들 수 없다.

사랑 욕구가 일생 동안 쉬지 않고 안정적으로 공급되어야 피폐해지지 않고 살 수 있다.

나이, 지식, 경륜, 성찰이 아무리 깊은 사람도 사랑을 받지 못하면 마음이 뒤틀린다.

대상은 나이와 상황에 따라 끊임없이 이동하지만 욕구 자체는 변치 않는다.

결핍이 더 쉽게 일어날 수 있는 조건과 상황 때문에 욕구는 더 절박하고 강렬해진다.

나이가 들면서 사랑에 댛나 욕구에 덜 휘둘리며 품위 있게 사는 노년도 있지 않나 생각할지 모른다.

그렇게 보이는 사람이 있을 순 있어도 그 이유가 욕망을 잘 절제해서라거나 욕망 자체가 줄어서가 아니다.

그런 사람은 충분히 사랑받고 깊이 인정받은 사람이다.

그래서 욕구로부터 자유롭고 연연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충족된 욕구는 더 이상 욕구가 아니므로 충분히 사랑받은 사람은 그 욕구에 휘둘리지 않고 품위를 유지할 수 있다.

 

존재의 외형은 노력과 재능, 재력으로 구축할 수도 있지만 사랑 욕구를 일생 안정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으려면 고도의 인간관계 능력이 필요하다.

연인이나 배우자, 자식들에게 한 존재로서 온전히 사랑받는 일은 재력이나 권력과는 별개의 중요한 능력이다.

나와 또다른 존재 간에 공감적 관계를 유지하는 일은 삶의 동력원을 확보하는 일이다.

일생을 살아갈 안정적인 동력원인 사랑의 공급에 차질이 생기지 않게 만드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과제 중 하나다.

가장 단순한 이 일이 참 어렵다.

사람의 마음은 항상 옳다는 것, 사람을 그 존재 자체로 수용하고 공감하는 일이 치유의 근원이라는 당연하고도 단순한 명제가 두려울 만큼 어렵게 느껴진다고 했다.

서로의 사랑에 대한 욕구를 지겨워하지 않고 비난하지도 않고 정면으로 마주한 채 기꺼이 공급하며 공급받는 일은, 우리 모두가 자기 삶의 동력을 마련하는 일이다.

미룰 수도 외면할 수도 없는 일이다.

 

#4

 

우리 마음속에도 그의 '무엇' 같은 것들이 여러 형태로 존재한다.

여기서 '무엇'이란 한때 걸려 넘어졌던 돌부리 같은 내 안의 콤플렉스다.

그래서 융통성 넘치고 너그럽다가도 어떤 일에는 심하게 열을 받는다.

옆에서 보기에도 이해하기 어려울 만큼 어떤 지점에서 황소고집을 부리기도 한다.

그 지점과 연결되면 타인에 대한 공감은 물건너 간다.

자신에 대한 성찰을 건너뛰고 타인의 마음을 공감하는 일로 넘어갈 방법은 없다.

자기 성찰의 부재는 공감을 방해하는 허들이 된다.

 

'나중에 딴소리 마라, 후회하거나 힘들단 소리 하지 마라'는 강요성 다짐은 아이의 퇴로를 막은 거나 마찬가지다.

진로는 몇 회까지 바꿀 수 있다는 법조항이라도 있는가. 없다.

직업은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

열 번, 스무 번 계속 바꾼다고 안 될 이유가 없다.

계속 바꾼다는 건 흔히 생각하듯 게으르거나 끈기가 없어서만은 아니다.

자기를 찾기 위한 고민을 계속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 고민 속에는 '왜 나는 한 가지 일을 진득하게 오래 하지 못하는 걸까?'라는 생각도 늘 함께 들어 있다.

사람은 그런 존재다.

당사자는 그런 자신에 대해 남보다 더 많이 자책하며 생각한다.

그러니 그런 강요는 아이의 퇴로를 막고 철창에 가두는 것과 마찬가지다.

부모라는 이름으로 자식에서 행했던 협박성 계몽이 부모의 도리나 역할인 줄 알았던 폭력의 시대가 지금은 아니다.

그런 시대는 끝났다. 끝나야 한다.

나는 그녀에게 내 딸이 지금 결혼한다면 '언제든 네 맘에 아니다 싶으면 돌아와라. 너는 그동안 사랑을 많이 받고 현명하게 잘 자랐다. 네가 그렇게 판단하면 언제나 그게 옳은 거다. 언제든 와라. 엄마아빠는 항상 네 뒤에 있다'라고 말할 거라고 얘기해줬다.

부모의 그런 말에 영향을 받아 관계를 쉽게 끝내는 사람은 없다.

절대적으로 믿어주고 지지해 주는 부모가 뒤에 있다는 걸 아는 딸은 어떤 힘든 상황에서도 모든 경우의 수를 늘어놓고 합리적으로 고민하고 판단할 수 있다.

 

사람은 자기가 안전하다고 느껴야 자신이 놓은 상황을 객관적이고 합리적으로 볼 수 있다.

그러니 공감에 제한을 둘 필요는 없다.

사람은 믿어도 되는 존재다.

사랑하는 사람의 유일한 역할이 그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해야 할 일이 있다면 공기처럼 강박적으로 스며드는 생각들에 당사자가 휘둘리지 않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그래야 여유 있게 자신을 점검하고 숙고해서 판단한다.

그렇게 하는 판단이 그에게 가장 좋은 판단이다.

 

결론이 어느 쪽으로 나든 개의치 말고 진심으로 물어봐 줘야 한다.

빠르게 대답을 하거나 대답을 들으려 애쓰지 말고 자기에게 질문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다음 그 질문 언저리에서 충분히 배회하며 머무를 수 있도록 자신에게 시간을 줘야 한다.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하려고 쫓기지 말고 자신에게 물어보면서 자기 마음을 먼저 둘러봐야 한다.

그 일을 계속하든 당장 그만두든 결론은 중요하지 않다.

처음으로 그 질문과 관련해서 자신에게 집중 또 집중하는 것, 자기 마음의 구석구석을 거울로 비춰주는 것, 어두워서 잘 안 보이는 곳이 있으면 플래시도 비춰가며 찬찬히 더듬어 보고 눈길도 포개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

좋은 대답과 결정이 자신을 지켜주는 게 아니라 자기에게 주목하고 공감해 주는 과정 자체가 자신을 끝내 보호하는 것이다.

 

아무리 훌륭한 말이어도 일방적인 계몽과 교훈은 사람에게 도움을 주지 못한다.

아무리 옳은 말이어도 듣는 이에게 강박 관념으로 남거나 상처만 주고 튕겨 나가는 경우가 더 많다.

그저 겉보기에 좋은 말일 뿐이다.

사람은 옳은 말로 인해 도움을 받지 않는다.

자기모순을 안고 씨름하며 그것을 깨닫는 과정에서 이해와 공감을 받는 경험을 한 사람이 갖게 되는 여유와 너그러움, 공감력 그 자체가 스스로를 돕고 결국 자기를 구한다.

 

그녀는 이전의 그녀가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더 담담하고 더 당당하고 더 안정적이다.

그녀를 감싸는 공기가 달라졌다는 것을 나는 느낀다.

그녀의 궁금함이 '오늘 잘했니? 얼마나 보람된 일을 했니?'라는 질문에서 '넌 누구니? 지금 네 마음은 어떤 거니?'라는 질문으로 이동하면서 일어난 일일 것이다.

 

타인을 공감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이유는 공감까지 가는 길 굽이굽이마다 자신을 만나야 하는 숙제들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그 길은 문제를 해결하며 한고비 한고비 넘는 스무 고개 같은 길이다.

내 심장의 일부를 찾는 뜨거운 설렘과 횡재의 길이기도 하다.

 

#5

 

누가 그 기준을 정한 건가.

왜 그 기준에 맞춰 나도 모르게 내 급을 정하고 있는가.

그 무엇도 그 집단의 표상이 될 수 없다.

한 집단의 특성으로 한 사람을 미루어 짐작하고 규정하는 것은 집단 사고다.

집단 사고에 의해 파악된 그는 '그'가 아니다.

'그'는 집단 사고에 의해 규정된 모습 그 이상이다.

 

진짜 '그'를 만난 적이 없을 수도 있다

 

공감이란 제대로 된 관계와 소통의 다른 이름이다.

공감이란 한 존재의 개별성에 깊이 눈을 포개는 일, 상대방의 마음, 느낌의 차원까지 들어가 그를 만나고 내 마음을 포개는 일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나도 내 마음, 내 느낌을 꺼내서 그와 함께 나누고 소통하는 일이다.

그렇게 서로의 개별성까지 닿지 않으면서 함께 사는 부부는 서로의 역할에 충실한 기능적 관계이기 때문이다.

기능적 역할에 충실한 관계라면 부부보다는 조직원이나 동료에 가까운 관계다.

사랑해서 만났어도 서로의 개별성에 다다르는 과정을 생략하다 보면 기능적 역할에 충실한 관계에 머물게 된다.

역할에 충실한 관계란 집단 사고에 충실한 삶이다.

역할 놀이 중인 삶이다.

이런 삶, 이런 관계 속에서 상대가 누군지, 나는 어떤 존재인지 알 수 없는 건 당연하다.

내 심리적 S라인이 드러나지 않는 삶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살면서 한 번도 그의 속살을 본 적이 없는 삶이다.

평생을 살아도 그가 누구인지 모를 수밖에 없는 삶이다.

 

'나'를 찾아서

 

개별적 상황과 개별적 존재의 생생함을 집단적 사고가 다 덮어서다.

우리의 오랜 습관이다.

그런 표현 속에서 개별적 존재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으니 그 실체를 전달할 수도 없다.

내 마음, 내 느낌 등 고유하고 개별적인 존재로서 내 육성에 접근해 가는 것이 제대로 된 관계의 시작점이고 그게 바로 공감이다.

다양하게 깎인 수많은 입체적인 면면들 때문에 빛이 드는 방향에 따라 빛깔과 분위기가 달라지는 예각의 크리스탈 조각 같은 존재가 사람이다.

그런 존재를 집단적 정체성이라는 둔각으로 뭉개는 일은 자신에 대한 폭력인 동시에 자기 은폐나 억압, 사람이란 존재에 대한 무지다.

 

#6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다.

각자의 기질이나 취향, 삶의 경험을 통해 설정된 자기만의 알고리즘이 있다.

편견일 수도 있지만 편견일지라도 자기만의 잣대가 있어야 사람 만나는 일에 스트레스를 덜 받는다.

괜찮은 사람이라고 판단이 서야 긴장을 내려 놓을 수 있다.

마찬가지로 삶에는 변수가 많지만 최소한의 상수가 존재해야 한다.

여러 유형론의 틀 앞에서 '모든 인간은 유일하고 개별적인 존재'라는 명제는 초라하고 부질없는 말처럼 들린다.

그런 점에서 심리적 유형론은 공감을 가로막는 적폐가 되기도 한다.

사람을 어느 특정 유형으로 바라보는 일반화의 시선은 그가 어떤 존재인지를 모르게 한다.

그 시선으로는 절대 개별적 존재의 그를 만날 수 없다.

 

외형적 조건은 사람의 한 부분일 뿐

 

증거들이 널려 있음에도 그것이 우리 인식에는 좀처럼 반영되지 않는다.

실제와 인식 사이의 거리가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S대를 나왔다면, 사법고시를 패스한 사람이라면, 돈을 그렇게 많이 벌었다면 여전히 다시 쳐다본다.

나와는 뭔가 다른 사람일 거라 여긴다.

물론 그렇지 않다.

학력이나 지위, 자격증이나 재산 규모 등 외적 조건과 환경에 의해 규정되는 영역은 항상 그 사람의 한 부분이다.

사람은 그보다 더 크고 복잡한 여러 부분들로 이루어진 존재다.

몇 가지 조건에 의해 전체를 예측하고 가늠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6장

 

#1

 

감정이 예민하고 섬세한 아이와는 어떤 방식으로 소통할 수 있고 공감할 수 있을까.

공감은 한 사람의 희생을 바탕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공감은 너도 있지만 나도 있다는 전제에서 시작되는 감정적 교류다.

공감은 둘 다 자유로워지고 홀가분해지는 황금분할 지점을 찾는 과정이다.

누구도 희생하지 않아야 제대로 된 공감이다.

잘 모를 때는 더 물어야 한다.

이해되지 않는 걸 수용하고 공감하려 애쓰는 건 공감에 대한 강박이지 공감이 아니다.

 

관계란 것은 상대가 있는 게임이다.

홀로 모든 것을 파악할 수 없다.

내가 전부가 아닌, 나도 있고 너도 있는 판이기 때문이다.

결론을 이미 갖고 있던 그녀가 고심 끝에 던진 질문들은 궁금해서 던진 질문이라기보다 자기 결론을 은연중에 전달하련느 의도가 담긴 '질문 형식의 조언이나 계몽'이었다.

그녀는 엄마로서 특별하다 할 만큼 애를 많이 썼다.

하지만 그 수고가 아이의 마음과 상황을 알아가면서 자연스럽게 공감하는 지경까지 이르지 못했다.

 

아들 여자친구에 대해서 물어보듯이

 

아들에게 소중했던 대상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구체적인 정보를 공유하다 보면 아들은 대상에 대해 그렇게 민감한 자기 마음에 대해서 자연스럽게 말하게 될 것이다.

'그때 네 마음은 어땠는데?'

엄마의 마음은 애쓰지 않아도 아들 마음에 스미게 된다.

엄마가 이해한 아들의 마음을 아들에게 다시 거울처럼 비춰주면 된다.

'그 대상은 그냥 대상이 아니라 우리 아들의 소중한 존재였구나'

공감은 내 생각, 내 마음도 있지만 상대의 생각과 마음도 있다는 전제하에 시작한다.

상대방이 깊숙이 있는 자기 마음을 꺼내기 전엔 그의 생각과 마음을 나는 알 수 없다는 데서 시작하는 것이 관계의 시작이고 공감의 바탕이다.

 

#2

 

상대방의 감정과 똑같이 느끼는 것이 공감인가.

공감은 똑같이 느끼는 상태가 아니라 상대가 가지는 감정이나 느낌이 그럴 수 있겠다고 기꺼이 수용되고 이해되는 상태다.

그 상태가 되면 상대방 감정결에 바짝 다가가서 그 느낌을 더 잘 알고 끄덕이게 된다.

엄마와 아들도 각자 개별적 존재들이라서 서로가 느끼는 감정은 당연히 다르다.

엄마가 아들이 느끼는 감정을 이상한 것으로 취급하지 않고 인정해 주는 느낌을 아들에게 전달할 수만 있으면 된다.

그게 공감이다.

 

다르게 느끼더라도 기꺼이 이해하고 수용하는 것

 

그때 내가 아이와 똑같은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면 공감이 아닌가.

공감이다.

'나는 미처 몰랐지만, 너는 그랬구나, 그랬었구나'하고 아이의 그 마음을 받아안는 것, 그것을 바탕으로 아이의 존재 전체를 이해하고 인정하는 것이 공감이다.

모든 인간은 각각 개별적 존재, 모두가 서로 다른 유일한 존재들이다. 

똑같은 상황에서도 같은 감정을 갖지 않는다.

다르다.

그러므로 공감한다는 것은 네가 느끼는 것을 부정하거나 있을 수 없는 일, 비합리적인 일이라고 함부로 규정하지 않고 밀어내지 않는 것이다.

관심을 갖고 그의 속마음을 알 때까지 끝까지 집중해서 물어봐 주고 끝까지 이해하려는 태도 그 자체다.

그것이 공감적 태도다.

공감적 태도가 공감이다.

그 태도는 상대방을 안전하게 느끼게 하고 믿게 하고 자기 마음을 더 열게 만든다.

 

#3

 

누군가의 속마음에 깊이 주목하고 귀 기울이기 시작하면 반드시 자기 내면의 여러 마음들이 떠오른다.

타인에게 귀 기울이는 사람에게 찾아오는 고통이자 축복이다.

자기 내면을 알 수 있고 치유할 수 있는 기회라서 축복이고 힘들어지고 혼란스러워지는 과정을 거쳐야 해서 고통이다.

 

그녀가 외롭게 산 것은 예민한 성격 때문이 아니라 예민한 성격을 잘못된 성격, 좋지 못한 특성이라 규정당하고 공감받지 못한 채 위축돼서 살아서다.

그렇지 않았다면 예민하면서도 당당하게 잘 살았을 것이다.

내 지난 세월을 누군가에게 다시 이야기하는 과정을 통해서 나도 동시에 공감받을 수 있어야 한다.

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아들을 제대로 이해하고 만날 수 없다.

자기 모습만을 무한 투사하며 불안해하게 된다.

 

너를 공감하는 일과 내가 공감받고 싶은 일이 있을 땐 항상 내가 공감받는 일이 먼저다.

내가 공감받아야 비로소 왜곡되지 않은 시선으로 너를 제대로 공감할 수 있다.

타인을 공감하는 일보다 더 어려운 것은 자신을 공감하는 일이다.

자신이 공감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엄마가 내게 무엇을 요구하고 기대하는 마음 없이 여유 있게 내 존재 자체에만 관심을 갖고 주목하고 있다는 느낌은 아이의 입장에서 더할 수 없이 안전하고 편안하다.

엄마의 그런 태도는 아들이 자기 말을 계속할 수 있게 하는 힘을 준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공감이 그것이다.

아이에게도 배우자에게도 사회적 관계의 누군가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원리다.

 

#4

 

'내가 너에게 주목하고 있고 함께 마음을 쓰고 있고 네 마음과 내 마음이 함께 움직이고 있다'

 

#5

 

누군가의 마음은 타인이 옳다 그르다 판단할 영역이 아니다.

마음과 느낌은 절대적으로 존중받아야 할 존재이다.

 

'그렇게 고통스러웠는데 버티고 살아줘서 고맙다. 엄마가 아무 도움도 못줬는데 이렇게 버텨줘서 고맙다. 미안하다.'

 

엄마는 너의 마음 외엔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는 적극적인 메시지다.

엄마는 네가 어떤 행동을 하든 엄마 맘대로 판단하고 규정하지 않고 너를 전적으로 존중할 것이라는 엄마의 존재 자체에서 나오는 다짐이다.

 

딸에게는 딸의 마음이 있고 딸의 이유가 있다.

그것은 딸의 경험, 거창하게 말하자면 딸 개인의 역사에서 비롯한 것들이다.

엄마의 마음, 엄마의 역사와는 다른 개별적인 것이다.

그녀는 딸에게 그렇게 끝까지 공감을 하면서 마침내 딸로부터 '사실은 술을 마시면서 비참한 적이 더 많았어'라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존재에 집중해서 묻고 듣고, 더 많이 묻고 더 많이 듣다 보면 사람도 상황도 스스로 전모를 드러낸다.

그랬구나. 

그런데 그건 어느 마음에서 그런 건데.

네 마음은 어땠는데?

핑퐁게임 하듯 주고받는 동안 둘의 마음이 서서히 주파수가 맞아간다.

소리가 정확하게 들리기 시작한다.

공감 혹은 공명이다.

누군가의 속마음을 들을 땐 충조평판을 하지 말아야 한다.

 

#6

 

'타이밍'이란 말이 사람들 마음에 꽂혔다.

우리 마음에는 응급처럼 보이지 않는 응급이 곳곳에 숨어 있다.

그래서 우리의 일상적인 공감은 나도 모르게 누군가의 목숨을 구하는 심리적인 CPR이 된다.

CPR의 핵심은 타이밍이다.

그 즉시 시행하지 않으면 목숨을 놓친다.

 

나만 여러 생각과 걱정을 한다고 여긴다면 아이를 한 개별적 존재로 바라보지 않아서다.

나도 생각하고 아이도 생각한다.

아이도 나와 같은 한 개별적 존재다.

 

사람들의 집단 무의식 중 하나가 거짓말에 대한 두려움이다.

거짓말을 허용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거짓말에 대한 강박에 묶여서 사람 마음을 제대로 보기 어렵다는 말이다.

 

엄마로부터 충분한 공감을 받고 자유를 얻은 아이는 상처 이전과는 '또다른 아이'로 성장한다.

그래서 비슷한 상황을 다시 접해도 아이는 지금의 이 아이가 아닌 '또다른 아이'로서 그 상황을 마주하게 된다.

비슷한 상황을 만난다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날씨는 하루하루의 바람과 습도, 주변의 기압 등 주변 모든 상태와의 상호 작용을 거치며 계속 달라진다.

한순간도 고정되지 않고 계속 움직이고 달라진다.

치유를 경험한 마음은 성장하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상처가 치유되는 과정에서 여섯 살 아이는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그게 끝이 아니구나. 해결하고 벗어날 수 있는 거구나. 엄마는 언제나 내편이구나' 하는 것을 몸으로 익힌다.

그 힘으로 삶을 단단하게 살아갈 수 있다.

사람이 배우고 알아야 하는 것들은 이런 것들이다.

 

 

 

728x90
반응형
BI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