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0. 14. 14:49ㆍBook
(책 속에서)
들어가며
여러분은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고통이 멈추고 상황이 빠르게 개선되기를 바랄 것이다.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이 문제들은 평생 안고 가야 하는 거들이라는 진실, 즉 새로운 곳에 갈 때나 새로운 사람들과 관계를 맺을 때, 인생에서 새로운 국면을 맞을 때 언제나 이 문제들을 다시 마주하게 될 것이라 이야기해줬다고 해도, 여러분은 당장 그 상황에서 벗어나기를 간절히 원할 것이다.
하지만 진실은 어떻게 해도 바뀌지 않는다. 융이 지적했듯, 우리는 결코 이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다. 오히려 문제들은 점점 더 늘어나기만 한다.
이 책은 해결책이 아니라 삶의 태도와 행동, 원칙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는 계속해서 우리 삶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문제들을 '성장'의 발판으로 바꾸기 위한 것이다. 성장은 자기반성, 즉 지금껏 변화에 저항해왔던 과거의 나로부터 서서히 탈피해나가는 과정이다.
이 책을 통해 각자의 내면 깊은 곳에 존재하는 자신에 대한 경외심을 발견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우리가 각자의 경외심을 발견해낸다 해도 살면서 겪게 되는 실망감과 고통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진정한 삶이라는 여정이 주는 깊이와 위엄에 대해 알게 될 것이다. 이 행성에서 잠시 머무르다 가는 이들이지만 우리는 진정한 삶의 주인으로서 행동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삶은 보다 즐거워질 것이며 과거 그 어느 때보다 생의 깊은 곳으로 우리는 안내받게 될 것이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영혼을 향한 여정에 동참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제는 우리에게 내려진 지시가 무엇이었는지 확인해볼 시간이다. 새로운 항로를 설정하고 바람의 방향에 맞춰 항해를 계속해나가야 한다. 이렇게 이동해나가는 동안 우리의 목적지는 바로 눈앞에 펼쳐질 것이다.
1장 선택은 누구의 몫인가
"나는 누구인가?"
"내가 이곳에 온 목적은 무엇인가?"
'선택은 자신의 몫이다.'
무의식의 힘은 과소평가될 수 없다. 우리의 자아의식(ego consciousness) 즉 우리가 생각하는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혹은 우리가 진실이라 믿는 것이 무엇인지는 기껏해야 무지갯빛 바다 위에 떠 있는 작은 과자 조각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게 어떤 순간이든, 우리는 왜곡된 렌즈를 통해 세상을 바라본다. 렌즈의 프레임 밖은 우리 시야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오로지 렌즈를 통해 본 것을 근거로 선택하게 된다.
우리가 의식적으로 선택하려 할수록 무의식이 우리의 일상적 선택에 미치는 영향을 인지하게 된다. 인생의 중대한 시기에 우리는 왜 하필 그런 선택을 한 걸까? 그때 왜 하필 그 사람과 관계를 맺게 되었을까? 왜 우리는 원가족 형태를 되풀이하는 걸까? 이러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 하지만 우리가 스스로에게 이렇게 묻지 않는다면 안락함만을 추구하는 내면의 힘에 의해 인생이 좌우되고 만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러한 기대나 훈육, 금지에 대한 역사적 힘이 의식적으로 신중하게 고려되어야 하며, 실제 우리 삶의 경험과 내면의 설득을 통해 검증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역사나 전통이 가진 힘이 아무리 강력해도 우리 삶 자체가 역사나 전통에 지배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분별하는 과정을 반드시 선행해야 한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야 한다. 이것이 내 지난 경험과 일치하거나 부합하는 행동인가? 그렇지 않다면 타인의 의도나 권리와 상관없이 나에게는 옳은 행동이 아니다. 이러한 가치와 관행, 기대가 인생의 심연으로 나를 안내하는가? 새로운 관계의 가능성을 열고 내 영혼의 가장 깊은 곳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감정과 일치하는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가치와 관행, 기대가 아무리 매력적일지라도 나에게는 독이 될 뿐이다.
앞서 단정적으로 말했던 "선택은 나의 몫이다"라는 말은 더 이상 당연하지 않다. 특정한 순간에 처했을 때, 의지를 드러낸 수많은 목소리가 우리 내면으로부터 들려온다. 그 불협화음 속에서 과연 어떤 목소리가 진짜 나의 목소리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어떤 목소리가 영혼의 심연에서 나온 목소리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콤플렉스나 문화 형식으로부터 비롯된 목소리는 아닐까? 그 차이는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
영혼의 불꽃은 우리의 육체가 책임을 떠맡고 이치에 맞는 삶을 선택하기를,
그리고 그것이 삶에 대한 봉사임을 깨닫기를 기다리고 있다.
우리의 삶은 두 번 시작된다. 우리가 태어난 날. 그리고 삶에 대한 근본적인 사실을 우리가 받아들이는 날. 분명 한계가 존재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택의 주체는 자신이라는 삶의 근본적인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삶의 근본적인 사실에 마음을 열고 책임을 다하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선택의 힘을 믿을 수 있게 된다.
우리의 선택을 방해하는 것은 두 가지다. 첫째,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자신을 드러내면 대체로 부정적인 반응을 이끌어낸다고 배웠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각자의 욕망을 억제하거나 숨겨가면서까지 세상과 조우하는 안전한 방법을 배워야 했다. 또한 거인 세상에 온 소인마냥 우리는 세상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이해하고 통제하는 사람들에게 지배되고 있다고 추론한다. 우리 자신에게 보호 적응(protective adaption)을 거부한 정신(psyches)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얼마나 당황스러울까. 내 안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낸 사람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얼마나 허무할까. 우리의 예측과 기대는 시간이 지나면서 사라지고, 혼란과 실망, 냉소, 때때로 믿을만한 권위자를 찾는 분주한 탐색으로 대체된다.
우리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선택을 해야만 한다. 우는 소리는 그쳐야 한다. 그 순간, 내면에서 변화가 시작되고 비로소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생명력 넘치는 시간으로 삶이 가득해지는 순간을 경험한다.
우리의 삶은
스스로가 자신의 모습을 통해
표현하고 싶은 바가 무엇인지
드러내 보일 것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2장 성장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생을 살면서 우리가 짊어지는 두 가지 위협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두려움과 무기력이다.
우리 내면은 우리가 언제 게을러지고 회피하려 하며 합리화하는지 이미 알고 있다.
우리 안의 무언가는 이를 이미 인지하고 있고, 항상 기억하고 있다. 우리는 그 대답을 하지 않으면 안 될 때까지 가능한 한 오랫동안 영혼으로부터의 소환을 회피할 것이다. 우리가 마침내 "나에게는 책임이 있고, 내가 책임져야 하는 일이며, 내가 해결해야 하는 일이다"라고 대답하는 순간, 우리는 성장한다. 적어도 그 다음 단계인 퇴보와 회피의 순간이 찾아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용을 무찌르는 영웅의 신화처럼 우리는 일상을 삼켜버릴 것 같은 두려움과 무기력에 맞서 뒤엎어야 한다. 머지않아 우리는 각자가 두려워하는 것을 마주하고 우리 내면의 무기력을 극복해야만 한다. 통제하기 어려운 상황을 맞닥뜨리게 될지라도 우리가 원래 어떤 사람인지 가능한 한 그대로 보여줘야만 한다. 이렇게 최선을 다하는 것만이 우리가 성장할 수 있는 방법이다. 원래의 모습을 드러내 보이는 것. 이것이 바로 삶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바이다.
'나는 인간으로서 해야 할 일을 하기 위해 일어나는 것이다.'
나는 스스로에게 다시 한 번 이렇게 말한다.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면 두려움과 무기력에 맞선 내적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그 싸움에서 패배했다 할지라도 진정한 어른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면 된다고 다시금 생각한다.
삶이 우리에게 바라는 태도가 바로 이러한 것이다. 성장하고, 책임감을 갖고, 현재에 충실할 것. 이것이 배우자와 아이들, 그리고 더 나아가 이 세상이 우리에게 바라는 태도다. 우리가 계속해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일 때, 그것이 언제든, 비로소 진정한 어른이 된다. 그렇게 이 세상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존재가 아닌, 세상이 짊어지고 있는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기여하는 존재가 된다.
3장 과거는 어떻게 현재를 얽매는가
우리가 삶이라고 부르는 장기 방영 중인 연속극의 모든 장면에 등장하는 유일한 존재는 바로 우리 자신이다. 이 드라마가 어떻게 전개될지는 전적으로 우리에게 달려 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자신과 타인에게 나쁜 영향을 미치는 행태에 계속해서 얽매이는가?
인생은 연결과 분리의 연속이다. 어머니의 자궁에서 분리되는 순간부터 시작되는 이 과정은 우리가 살면서 결코 회복할 수 없는 최초의 트라우마이기도 하다. 계속되는 삶의 여정에서 우리는 누군가와 연결되었다가 분리되는 경험을 지속한다. 우리 삶 속에 깊이 들어왔다가 사라지는 사람도 있다.
"무슨 일이시죠? 원하는 게 무엇인가요? 어떻게 해야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요?"
이처럼 존중하는 태도로 내면과의 대화에 나설 때 비로소 우리는 과거와 이별할 준비를 시작할 수 있다. 과거의 많은 부분이 미래로 나아가는 데 도움이 되긴 하지만, 도움이 되지 않는 부분 또한 많다. 우리가 정기적으로 집을 청소하고 낡은 옷들을 정리하면서 더 이상 입지 않을 옷은 처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반드시 우리의 축적된 과거와 삶의 태도, 무의식적 행동, 반응 등을 정리해야 한다. 그리고 그 중 더이상 생산적이지 않으며 의미가 없고 성장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 쓸모없는 것들은 버려야만 한다.
4장 나는 왜 스스로를 두려워하는가
융은 우리가 겪는 모든 어려움은 본능, 욕구 같이 우리를 보다 완전함으로 이끄는 감정 상태로부터 우리가 분리되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고 주장한다. 니체는 더 나아가 인간을 '병든 동물'이라 지칭하기도 했다.
본능이 너무 강하면 우리는 동물적인 존재로 규정되지만, 반대로 지나치게 의식에만 집중하면 자연스러운 근원으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적어도 우리 대부분에게 인생의 전반기는 매우 거대하고도 피할 수 없는 실수 그 자체로 가득한 시기였을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아이들이 고통스럽게 경험한 일들은 인생이라는 여정에 진정성을 더하는 역할을 한다. 다시말해, 무엇인가 배우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배움을 얻는다.
운명이나 우리 내면의 깊은 무언가가 우리의 근원적인 전제에 대해 검토해보도록 강요할 때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 그 전제는 우리가 생각해본 적 있는 것으로, 우리 내면에 영향을 미쳐 우리를 차별화시킬 가능성도 있다.
개인의 권한을 찾기 위해서는 다음의 두 가지에 주의를 기울어야 한다.
첫째는 문제를 자세히 살펴보는 일이고, 둘째는 우리가 살펴본 바에 대해 용기와 일관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다.
통찰력, 용기, 인내라는 세 가지 과업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가 살면서 마주하게 되는 딜레마들 또한 이해할 수 없다.
용기란 자신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용기의 정의를 다시 생각해보면, 우리 모두는 인생의 여정을 다시 바라보고 자신과 세계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건강함과 온전함이 어떤 것이든 상관없이, 외부의 선택과 내면의 현실을 조화시켜나가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우리가 가고 있는 길이 영혼으로 향하는 길이라면, 에너지는 바로 그곳에 있다.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 옳은 일이라면, 감정 기능이 우리를 지지해준다. 즉, 우리의 자율감정체계가 우리의 선택을 지지해준다. 자율감정체계의 지지를 받게 되면 주변 사람들이 우리의 선택을 지지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의 선택이 옳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가 옳은 일을 할 때, 목적이나 의미, 만족감을 느끼게 될 것이며, 그를 통해 다른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시간을 두고 분리 및 정렬을 하게 되면 분별력이 생기게 된다. 분별력은 우리에게 수많은 요구들이 전해질 때나 의무가 충돌했을 때, 우리의 콤플렉스가 충동적으로 일어나는 상황에서 우리의 목소리를 찾는데 반드시 필요하다.
통찰력과 용기, 인내는 지루하고 장황한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가 매일 신경 써야 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늘 요구되는 것처럼 우리가 하루하루 이 세 가지를 기억하고 최선을 다해 신경 쓴다면 권한이 없던 과거로부터 개인의 권한을 되찾는 날이 우리에게 올 것이다.
그렇게 될 때, 우리가 진정한 인생의 후반기, 즉 우리의 삶을 다시 되찾게 해줄 그 시기로 넘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5장 불안은 무엇으로 나를 지배하는가
우리는 우리가 두려워하는 행동을 마주해야만 한다. 죄가 보호하고 있는 모든 행동은 반드시 우리가 직접 경험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만, 오래된 과거의 불안을 씻어내고 우리 자신의 모습으로 제대로 설 수 있게 된다. 그렇게 할 때만, 우리는 이 불안의 바다를 헤엄쳐나갈 수 있다. 또한 불안이 우리를 훼손시키거나 패배시키거나 단념시키거나 우회하도록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며, 결국 자유로워질 수 있다.
우리는 반드시 우리의 영혼에게 보상을 해주어야만 한다.
우리가 한때 보호막을 침으로써 우리의 영혼을 상하게 했고, 쓰라리게 만들었으며, 비겁한 행동들을 보였고, 무엇보다 이런 일들이 반복해서 일어나도록 내버려둔 점에 대해 반드시 보상해야 한다.
6장 나는 지금 누구의 삶을 살고 있는가
우리가 갈망했던 것은 바로 '확신'이라는 무의식이다. 그 확신이라는 것이 무지한 사람들을 안심시키고, 이들을 스스로에게 고착화된 신념과 행동의 범주 내에서 행동하도록 지켜주었다. 그 시절 세상은 무지하고, 두려움에 사로잡힌 편협한 곳이었다. 그러한 모습이 현재 많이 사라졌다는 사실에 나는 감사할 따름이다.
이제 우리 앞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선택지가 놓여 있다. 첫째, 과거의 메시지를 따라 우리가 지금껏 봐왔던 그 모습을 반복하는 것. 둘째, 과거로부터 벗어나 과잉보상하는 것. 셋째, '과거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 이는 무엇이 우리 안에서 분열을 야기하고 지속시키는지 알지 못한 채 어떻게 해서든 그 분열을 치유하고자 함을 의미한다.
증상을 억누르거나 그로 인한 불화를 없애려고만 하기보다는 이렇게 물어야 한다.
"왜 이런 일이 생긴 걸까?"
"내게 무얼 원하는 거지?"
"내면의 이런 모습으로 미루어볼 때, 내 삶을 어떻게 재구성할 수 있을까?"
오직 이와 같은 순간에만 (비록 좋은 의도에서 비롯된 것일지라도) 부모의 관념이나 사고방식, 한계, 역할 모델로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있다.
우리의 삶을 가능한 한 충실하게 살아나가는 것이 우리의 영혼에게 답하는 선물이 된다.
그뿐 아니라, 우리의 다음 세대들이 그들만의 삶을 자유롭게 살아나가도록 하는 방법이 될 것이다. 우리가 과거 부모로부터 원했던 우리만의 삶을 누릴 자유를 자녀들에게도 주는 것이다. 우리 아이들도 그들 자신만의 삶을 살아나갈 수 있도록.
7장 계획은 왜 항상 실패하는가
심층심리학을 통해 외부적인 행동만이 아니라 한 사람의 내면까지 전체를 고려해볼 수 있다. 나는 여러분에게 무의식의 세계와 대화하고 눈으로 지각할 수 있는 곳에서 흐르는 보이지 않는 에너지의 경로를 추적해볼 것을 제안한다. 그 목표를 위한 원칙 두 가지는 바로 이것이다.
무엇에 관한 일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보상이다.
첫 번째 원칙은 꽉 막혀 있는 부분이 원래 그렇게 쉽게 드러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려준다.
우리는 어느 지점이 꽉 막혀 있는지 분석해야 한다. 또한 우리가 쉽게 찾아낼 수 있는 부분이 어디인지 알아내야 한다. 예를 들어, 그 행동이 식별 가능한 것인지, 아니면 우리의 삶을 이끄는 보이지 않는 매커니즘인지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모두는 분리된 이 세상에서 연속성과 연결성을 제공하는 것처럼 보인다. 지금 이 세상은 개인이 자신의 연결고리들을 직접 찾아나가야만 하는 세상이 되었다.
결국, 우리의 생존과 안녕에 두 가지 위협 요소가 생겨났다. 바로 압도당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포기에 대한 두려움이다. 두 번째 위협 요소인 포기에 대한 두려움은 배려, 지속성, 안도감에 대한 요구를 강압적인 행동을 통해 획득함으로써 다른 사람을 멀어지도록 한다.
우리는 꽉 막힌 상태에서 벗어나는 일이 왜 그렇게 어려운지 그제야 파악하기 시작한다. 꽉 막혀 있는 상태는 상태 그 자체에 관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알아낼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파악할 수 없는 부분들의 표면 정도일 뿐이다. 우리가 볼 수 없는 것은 이 민감한 유기체가 움직이는 방식이다. 우리는 방어와 예측을 통해 대상이나 행동, 이미지, 관행, 규약, 제도, 신조를 정확하게 만들어낸다. 이러한 것들이 우리 모두가 종속되어 있는 과거의 불안을 어느 정도 해소해줄 수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8장 본연의 임무는 무엇인가
융은 자신이 관찰한 모든 사례들에서 참여자들이 처음부터 자기 본연의 임무가 무엇이었는지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당시의 신경증이나 장애물들은 우리의 임무가 무엇인지 제대로 아는 것에 대한 암묵적 위협에서 발생한 표면적인 혼란일 뿐이다.
우리 내면은 항상 우리에게 적절한 것이 무엇이며 옳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세상이라는 거대한 힘과 그 세상에 어떻게든 적응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융은 심지어 신경증과 영혼의 순환은 모두 잘못된 무언가를 치유하기 위한 노력이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상처에 대비하는 이러한 방어체계들을 통해 우리는 또 다른 결과, 즉 2차 피해를 초래할 수 있다.
융은 이렇게 강조한다. "정신신경증은 반드시 궁극적으로 아직 그 의미를 발견해내지 못한 영혼의 고통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우리는 그가 고통을 배제하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아픈 말이 가장 빨리 완주한다'라는 중세의 속담도 있지 않은가.
고통으로부터 달아나게 되면 삶이 하찮아지고 정신이 분산되며 삶이 무감각해진다. 융이 분명하게 강조한 바는 의미를 향해 노력하는 삶을 살아야, 즉 각자의 딜레마를 확장된 관점에서 바라보고 영혼의 소환에 대해서도 확장된 시각을 가져야 어둠의 계곡에서 빠져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의 임무는 무엇일까?
우리 두 가지 임무는 바로 개성화(individuation)와 우리의 길을 가로막고 있는 구체적인 장애물, 즉 운명(fate)을 극복하는 일이다.
융이 말한 개성화란 종교적인 소환이자 새로운 관계나 약물로도 치유될 수 없는 우리의 병적인 모든 행동들, 즉 왜곡된 관계나 무기력, 산만함과 같은 만성적인 질환들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끄는 것이다 .누군가가 자신의 영혼으로부터 달아나려고 하는 한, 그 어떤 성취도, 타협도, 협상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개성화는 사실 일종의 봉사다. 하지만, 무엇을 위한 봉사인가?
역할이나 범주, 타인의 기대에 의해 정의된 삶이 아니라 우리의 삶으로 다시 나아가는 것, 즉 우리의 진정한 모습이 되는 임무로 돌아가는 것은 우리에게 가장 어려운 소환이다.
9장 어떤 길을 선택할 것인가
우리는 부나 권력, 명성, 타인의 칭찬을 위한 길이 아니라 확장의 길을 선택해야만 한다.
그것이 우리의 영혼이 바라는 바이기 때문이다.
융은 자신의 인생에 대해 쓴 여러 에세이를 통해 인생의 소환장은 바로 신성한 것으로부터 최초의 부름을 받는 소명, 즉 진정한 초대라고 언급했다. 이 소명에 복종하는 일은 우리보다 더 큰 존재인 종교에 복종하는 일과 마찬가지다. 이 부분에서 통로와 수수께끼가 존재한다.
천재란 우리 각자에게 내재해 있는 영적 존재인 정령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임을 기억하라. 비록 수년 전 이 정령과의 소통이 끊겼을지 몰라도, 우리의 내면에는 여전히 정령이 존재하고 있다. 그는 대중의 지지나 명예, 동료들과 소통한 것이 아니라, 온전히 자신만의 거대한 꿈과 소통했다. 때문에 나는 그를 매우 존경한다.
우리에게는 소명이 주어져 있다. 누군가의 소명은 고통받고 있는 이 세상을 돌보는 일일 수 있다. 또 다른 누군가의 소명은 예술 작품을 만드는 일이 될 수 있고, 또 어떤 이의 소명은 닫힌 문을 열고 마음의 족쇄를 부수는 일일 수 있다. 또 어떤 이들에게는 자연계에 대한 탐구가 소명이 될 수 있다. 또 어떤 이들에게 소명이란 가능한 것들을 제한하려고 하는 경계를 뒤로 밀어내는 일이 될 수도 있다. 우리 모두는 각기 다른 소명을 갖고 있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은 바로 우리 모두가 거대한 소환장을 받았다는 것이다.
세상에 대한 두려움은 당연한 것이다. 오직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만이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두려움만이 지배하는 삶을 산다면, 그것은 우리의 영혼을 짓밟는 일이 될 것이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더 큰 자신으로 나아가기 위해 자신의 두려움을 반드시 '통과' 해야만 한다. 나는 '통과한다'는 표현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다. 두려움을 통과하는 데는 그 어떤 마법도 존재하지 않고, 장애물을 제거하는 다섯 가지 단계와 같은 일련의 과정도 없다. 또한 두려움을 없애줄 약이나 마취제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직접 통과하고 난 뒤에 우리가 그 문제의 반대쪽으로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방법밖에는 없다. 타인의 승인이 없을 경우 내면의 아이가 지배당하고 심지어 압도당하게 된다 해도 결국 그 두려움을 통과해낸 사람은 자신의 내면에서 자기를 지지해주고 승인해주며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무언가를 발견하게 된다.
우리가 오랜 두려움과 오래된 믿음을 사라진 것인 양 취급하고,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우리의 삶을 살아감으로써 그 두려움을 통과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자기 내면의 목소리인 안내 요정을 "TWIHAT"라고 불렀다. 이는 '내가 항상 생각해오던 것(That Which I Have Always Thought)'의 약자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강한 신념의 체류자는 우리 모두가 내면에 지니고 있는 자신의 목소리를 신뢰했다. 그녀는 그 목소리를 믿었고, 그 목소리 대로 살았으며, 힘든 시기 또한 그 목소리와 함께 버텨나갔다. 그리고는 우리 자신의 개성화 과정이나 우리 자신을 안내하는 정신, 작은 것이 아닌 큰 것을 선택하는 일에 우리가 믿음을 가질 때 그러는 것처럼 그 반대편으로 나아갔다. 그러고 난 다음 우리는 우리의 자아가 아닌 세계를 위해 봉사하게 되고, 이 세계에 보다 더 큰 공헌을 하게 된다.
10장 나는 지금 왜 여기에 있는가
모든 젊은이들에게는 그들을 지지해주는, 긍정적인 태도를 가진 부모가 필요하다. 자녀의 힘겨운 노력을 무산시키며 폄하하는 부모가 아니라 자녀를 전적으로 믿어주는 부모가 필요한 것이다.
융에 따르면, 천재성은 상처에서 발현된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겪은 상처가 의식을 자극하고 결심을 하도록 만들어 상처를 압도할 정도의 풍부한 에너지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우리가 입은 상처는 우리의 회복력을 약화시킬 수도 있지만 우리가 성장할 기회가 되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가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내면화되는가?'이다.
이는 우리를 행동하게 하거나 행동하지 않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물음이다. 이 질문은 동일한 인생의 굴곡을 경험한 두 사람이 정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우리를 괴롭히는 꿈은 내면에 존재하는 거대한 무언가가 우리에게 존중과 대화를 요구하는 자발적인 표현이다.
우리는 모두 타고난 재능을 지니고 있다.
우리가 각자의 재능에 대해 생각할 때, 우리는 보통 무엇이 온전히 받아들여지는 것이며 무엇이 예외적인 것인지 혹은 무엇이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인지를 생각한다.
우리의 재능은 우리가 매일매일을 보내고 있는 초라한 일상을 통해 가장 잘 드러날 것이다. 내가 누구인지, 당신이 누구인지 바로 그 자체가 재능이다. 허세를 부릴 필요도, 과장할 필요도 없다. 허세나 과장은 자기회의에 대한 보상일 뿐이다.
'모든 피조물은 한 가지 같은 일을 한다.
각자 내면에 거주하는 제 존재를 밖으로 내보낸다.
자기 스스로를 발현한다. 그것이 '나'라고 명시한다.
'내가 하는 것이 나이며, 그 때문에 내가 왔다'고 외친다.'
"내가 하는 일이 바로 나다. 그래서 내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라는 외침은 과잉보상도, 필사적 행동도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겸허한 행동이다.
우리의 재능은 지극해 개인적인 반성의 시간을 통해 발견될지도 모른다. 이때는 각자의 자기도취적인 충동을 억제하게 된다. 또한 주어진 환경이나 그들을 약화시키는 메시지들에 맞서 몸부림치며 주춤하고 있는 다른 이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순간에도 우리의 재능을 찾아볼 수 있다.
자기만의 길을 가지고, 정해진 틀에 맞추지 않으며, 자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일은 우리의 재능과 개성을 삶의 중심으로 가지고 오겠다는 신호다. 쉬운 일처럼 보일 수 있지만, 사실 이는 매우 어렵다.
우리를 무능하게 만드는 과거의 메시지들 때문만이 아니다. 재능을 키우며 살기 위해서는 우리 내면의 재능이 충분히 탁월하고 현명하며 강인한 것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 있어야 한다. 세상이 우리를 통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어떻게 감히 무시한다는 말인가. 우리가 저항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재능은 두려움이라는 어둠이 내린 무채색의 세상을 환하게 밝혀줄 것이다.
11장 성인이 된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융은 무의식 상태로 존재하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죄나 마찬가지라고 이야기했다. 우리가 마침내 너무도 명백한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게 될 때, 즉 우리가 인생이라는 드라마 속 유일한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때, 우리는 의식적으로 우리 인생을 책임지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무의식 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우리의 행동양식을 확인해보는 것이다.
성인이 된다는 것은 몸이 자라거나 인생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일 그 이상을 의미한다.
이처럼 설득력 있는 (대부분이 무의식적인) 메시지들에 직면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가장 흔히 나타나는 메시지들을 회상하고, 이 메시지들은 파괴적인 패턴들을 만들어낸다. 우리는 그 메시지들로부터 도망쳐 나와 우리의 인생을 보상하고자 한다. 즉, '오로지 어머니 같은 삶'을 살려 하거나 '아버지의 인생을 절대로 되풀이하지 않겠어'라는 생각으로 사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자신이 원하는 바가 아닌, '타인'에 의해 정의 내려지는 삶에 머물게 된다.
이 타인은 우리의 삶에 지나치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들이다. 우리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며 다양한 종류의 진통제를 사용하여 어지럽고 복잡한 삶을 살거나 타인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융은 신경증이란 항상 진정한 고통으로부터 회피하려고 하는 데서 생겨난다고 언급했다. 그 어떤 사람도 고통을 느끼길 바라지 않는다. 하지만 융이 관찰한 바에 따르면 진정한 고통과 가짜 고통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존재했다.
이와 같은 순간들은 피할 수 없다. 최근 출간한 책에서 나는 이와 같은 순간들을 '유령의 출몰'이라고 불렀다. 그 이유는 우리가 다양한 종류의 유령들이 존재하는 역사적 구조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친근한 유령들, 해로운 유령들, 그리고 우리 앞의 길을 가득 메우고 있는 타인이라는 유령들과 다른 시간의 유령들, 다른 장소의 유령들이 존재하고 있다.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 패턴을 인식하는 것이 바로 첫 번째 단계다.
그러고 나서 우리의 남은 평생을 위해 그 패턴을 책임지게 된다. 이를 책임지는 데는 위험과 용기, 인내가 따르며, 오랜 시간이 걸린다.
어떤 날은 보다 확장된 삶이 이길 가능성이 있겠지만, 또 다른 날은 유령이 이길 가능성도 있다.
우리는 매일매일의 삶이 전쟁이라는 사실을 알아야만 한다.
이 전쟁은 역사의 긴장감 있는 대화와 영혼의 공해로부터의 초대 사이에서 벌어지는 전쟁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모험은 우리의 인생이 어떠한 것이며, 진정한 성인기란 어떠한 것인지, 그리고 영혼의 여정이 요구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대변해주는 역할을 한다.
12장 나는 어떻게 불려야 하는 존재인가
자아와 세상에 대한 이미지는 일찍이 특정한 틀에 맞춰져 왔다. 지금까지 그래왔듯, 맞춰진 틀 바깥에 존재하는 더 큰 세상을 우리는 거의 볼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각자의 내면에 존재하는 또 다른 자율적 지성을 인정하고 존중하며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 내면의 자율적 지성은 지금껏 우리의 안위를 위해 큰 역할을 해왔고, 그 나름의 현명한 방식을 지켜왔기 때문이다.
이는 전지전능해 보이는 자아가 실제 우리 삶의 주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치유 기제들에는 꿈이나 증상 등이 있다. 이 두 가지 모두 자발적이며 본질적인 정신의 표현으로, 진정성 있고 존중을 표하면서도 겸손한 대화를 수반한다. 이 기제들은 우리 존재에 대한 신비를 푸는 보다 깊이 있고 풍부한 경험과 광범위한 시각을 우리에게 제시해줄 수 있다.
"나를 위한 보다 더 큰 그림은 무엇일까?"
그렇다면, 이제는 과연 무엇이 우리에게 거대한 그림이 되어줄까?
우리 모두에게는 보다 큰 그림을 갈망하는 무언가가 존재한다. 우리 내면에는 관계 맺기를 희망하고, 일상생활의 사소한 것들, 즉 우리의 시스템을 작동하게 하는 사소한 것들이 재구성되기를 바라는 무언가가 존재한다. 우리가 위대한 종교가 부르는 거대 산업은 지혜의 선집과 시대를 초월한 이야기, 인간의 영혼이 뒤바뀐다는 통찰력 등으로 채워져 있다. 이러한 종교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인간이 유영하고 있는 이 세계에 유용한 많은 것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우리가 사용하는 지침을 평가하는 다른 기준들을 찾아내야만 한다.
우리를 지배하는 콤플렉스는 우리가 경험해온 역사의 응집체로, 그것이 전하는 메시지는 시간에 좌우된다. 이 콤플렉스들이 발현되는 한, 우리는 그것들이 구현해놓은 작은 세계에서 살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정신병도 없고 영혼의 동요도 없는데 왜 우리는 우리에게 허락된 제한적이고 자기복제적인 프레임에 의문을 품는 것일까? 우리가 받아들이는 종교적 가치가 어떠한 것이든 관계없이, 또다른 평가 기준을 나는 이렇게 제시하고자 한다.
먼저, 우리가 계속해서 마주하는 삶의 신비한 경험은 우리 자신과 세계에 대한 이해를 재구성할 것을 요구하는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압박감을 느끼거나 감정적으로 억제된 상태가 될 것이고, 감정에 사로잡힌 상상력이 부재한 상태보다 확실성이 더 부족한 지경에 머물게 될 것이다.
우리의 개념과 관행, 이해, 심지어 가치를 재구성하는 일은 불안을 야기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하지만 성숙한 영적 상태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바라는 것보다 더 많은 불안을 견뎌낼 수 있도록 만들어줄 것이다. 진정한 삶은 모순을 포용하고 모호함을 견뎌내며 미숙한 정신 상태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이분법적 사고에 빠지지 않을 것을 우리에게 요구할 것이다.
성숙한 영성은 확실성을 제공해주는 것이 아니라 신비를 남겨준다. 성숙한 영성은 깊이를 제공하고 우리의 이해를 재구성하도록 하며 정신적으로 성장할 것을 요구한다.
우리가 살아 있는 이유는 안전함을 추구하기보다 진정한 삶을 살아나가려고 하기 때문이다. 안정적인 정체 상태보다 발전을 추구하기 때문이며 불안해하며 도망치듯 살고 있는 군중들과 달리 영혼을 위한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13장 가장 오래 지속되는 기쁨은 무엇인가
행복의 척도라는 것이 우리 삶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다. 부정과 무지의 방식에 기반한 행복은 영혼과 영혼의 깊이에 상처를 주는 것이다. 계속해서 남아 있는 것은 바로 의미다. 과연 의미란 무엇인가? 고대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는 이와 같은 질문과 씨름했다. 에피쿠로스는 '쾌락주의자', 보통은 '훌륭한 식사'라 번역되는 단어의 어근으로도 쓰인다. 그렇다. 훌륭한 식사는 즐거운 경험일 수 있고, 때때로 기억에 남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일단 그 경험을 하고 나면 훌륭한 식사의 효과는 지나가버린다. 풍성하고 호화로운 식사를 마치고 난 뒤에는 그 누구도 똑같은 식사를 다시 한 번 더, 혹은 그 뒤로 또 계속하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
에피쿠로스는 우리가 오히려 노골적으로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피하려는 존재라는 점을 감안하여 우리에게 지속적인 쾌락을 가져다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추론했다. 먹는 것은 답이 아니었다. 비록 미각의 즐거움이 일시적인 만족감을 제공해주긴 하지만, 한 번 만족을 경험하면 동일한 욕망의 대상은 결국 불쾌한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에피쿠로스는 가장 오래 지속되는 기쁨은 감각이 아니라 철학 그 자체라고 결론 내렸다. 그의 결론이 크게 틀리지 않았던 것 같다. 비록 모든 이들이 기쁨을 위해 첫 번째로 택하는 것이 철학은 아닐지라도, 에피쿠로스라면 아마도 인간의 정신 상태야말로 이 질문에 대한 핵심이라고 답했을 것이다. 만약 철학이 지속되는 모험과 발견을 제공해준다면, 그로써 계속되는 즐거움을 가져다줄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지속적인 만족감을 얻는 방식은 우리의 태도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욕망 그 자체인 에로스다. 에로스는 삶의 모든 움직임을 새롭게 하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가장 어린 신이다. 또한 모든 생명체의 근본이기 때문에 가장 오래된 신이기도 하다.
나는 이 모든 혼란을 불러일으키는 사후세계에 대해서도 믿지 않는다. 사후세계가 존재한다 해도, 그 삶은 지금의 삶, 즉 내가 살고 있는 이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사후세계가 존재한다면 그 세계는 우리가 알고 있는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어놓아 이해할 수 없게 만들 것이다. 사실 사후세계라는 것이 정말 존재하는지도 의심스럽다. 이제 더는 사후세계를 열망하지 않는다. 내가 열망하는 바는 천국의 영원과도 바꾸지 않을, 지금 현생에서의 경험이다. 천국과는 반대로 추악한 모습이겠지만, 현생에서 나는 지금껏 중요한 경험들을 해왔다고 장담한다.
인생에서 큰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 인간 정신의 회복력을 보여줄 때 나는 감동받는다. 고통을 이겨내고 다음 단계로 도약하는 그들의 모습은 나를 행복하게 만든다. 바로 그 모습이 의미에 대해 생각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트라우마를 겪었거나 실망감이나 절망감을 이겨내는 사람들을 보는 것은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의미 있는 일이다. 그런 영혼들과 일상을 함께한다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이는 만약 내가 엄청난 특권을 지닌 사람이라 하더라도 나를 겸손한 사람으로 만들어준다. 다른 사람들을 통해 내가 배우지 못한 바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은 대단히 의미 있는 일이다.
우리가 행복을 목표로 추구한다면 모든 것은 상황에 따라 달라지게 된다. 일반적으로 홍수는 인간에게 있어 재앙이지만 목마른 사람에게 물 한 잔은 그야말로 행복이다. 더 위험한 순간이 닥치기 전까지는 위협에 처한 사람이 구조되는 순간은 행복한 순간이다. 이처럼 행복이란 일시적인 것이지만, 의미든 언제든 존재한다.
그렇다면 의미의 뜻은 과연 무엇일까?
의미는 상황에 따라 다르고, 모든 사람에게 그리고 시시각각 새로운 정의를 내릴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물론 그렇다. 의미는 매우 개인적인 것이며 맥락적인 것이다. 어느 두 사람이 만났을 경우, 한 사람은 상대방과 보낸 시간을 지루하게 느끼거나 상대방 자체를 두려워할 수도 있다. 반면, 다른 사람은 상대방을 매우 칭찬할 수 있고, 그로부터 감동을 받아 눈물을 흘릴 수도 있다. 내게 의미 있는 그림이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 의미 없는 것일 수 있고, 특정한 음악이나 생각 또한 마찬가지다. 이것들이 다른 사람들과 그들의 인생에 가치 있는 것이라 주장할 수 없다. 왜 그런 것일까? 의미란 영혼의 기관이기 때문이다. 바로 영혼이 중대한 의사결정권을 지니고 있으며, 영혼은 계속해서 전개되고 있는 우리 삶의 심리적 현실이다.
만약 우리가 정신의 표현, 즉 우리의 증상이나 갑작스러운 통찰력, 보상을 나타내는 꿈, 기복이 심한 감정 상태에 집중하게 된다면 이는 우리의 영혼이 계속해서 의견을 내고 있다는 뜻이다. 이 영혼의 의견은 일반적인 생각과는 매우 다르다. 다수의 것과는 반대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견은 우리를 불편하게 만들 수 있고 우리를 고립시키거나 우리가 두려워하는 여정으로 우리를 이끌 수도 있다. 다. 하지만 이 의견이 바로 우리의 영혼이 지금껏 참아왔던 바를 표출하는 목소리다. 우리가 과거에 그러했듯 이 같은 영혼의 표출을 무시하면 우리 자신에게 낯선 사람이 되어버린다. 억압되었던 것들은 갑작스러운 충동이나 통제할 수 없는 감정 폭발, 해결되지 않는 꿈,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 삶의 의미를 파괴하는 형태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
영혼은 무의식적으로 행복을 추구하면서 한쪽으로 치우친 빈약한 곳을 찾아 초점을 좁혀나간다. 의미를 경험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우리 내면의 깊이 있는 무언가에 대해 믿게 된다. 우리 모두는 이를 알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이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무기력함과 명백한 대안이 없다는 사실 때문에 이 같은 내적인 자극을 다른 한편에 치워두는 법을 배웠던 것이다.
아마도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영혼은 절대로 우리를 떠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내면의 정수가 무엇이든 영혼은 우리와 항상 함께하며 사라지지 않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나타날 것이다. 영혼은 상황에 따른 행복과 항상 존재하는 의미의 차이에 대해 알고 있다. 영혼은 계속해서 우리의 의식적인 책략과 합리화, 회피를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우리 자신보다 우리를 더 잘 알고 있는 영혼을 생각하면 우리는 행복의 유혹에 정신을 덜 뺏기게 된다.
이처럼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에 대해 재인식하는 순간, 우리는 우리의 내면 깊은 곳에서부터 확인된 길을 의미 있게 수행해나갈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 길을 따라 의미 있는 일을 하고, 희생하며, 어려운 과정과 문제들을 헤쳐나갈 때, 우리는 가끔씩, 아주 잠시나마 행복이 넘치는 경험을 하게 된다.
14장 왜 살아보지 못한 삶에 사로잡히는가
"우리는 완전한 존재로 태어났지만, 이 세상은 불완전한 곳이다."
우리는 정의내리기 어려운 목표인 완전함에 대해 생각해봐야 한다. 한편으로는 왜 우리가 우리 자신과 상충되는지, 왜 우리는 살아보지 못한 삶에 사로잡혀 있는 때가 많고, '이미 지나가버려 소용없는 일들'에 자주 실망을 느끼는지 의문을 가져야 한다.
모든 것을 현재의 삶에 채워 넣을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한 가지를 선택하면 다른 선택지들은 배제된다.
부모님과 같은 분들을 만난 것은 내게 축복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두 분으로 인해 자발성이나 분노, 기쁨, 희망과 같은 내 자신의 솔직한 감정들을 멀리하는 법을 학습했던 것이 사실이다. 나이가 들어 정신의 혼란을 겪고 난 이후에야 나는 비로소 뒤쳐져 있던 개인적인 보물들을 되찾아가기 시작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부모님을 비난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으나, 사실 나는 우리 부모 세대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동정하게 된다. 그 당시에는 심리치료를 받을 수도 없었고, 주변에서 그들을 지지해주는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 세대의 다른 분들과 마찬가지로 우리 부모님 역시 각자 처한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오셨다.
우리가 자제력을 갖고 있으며 위험에 대한 대비책을 세울 수 있고 이 세상과 다양한 방식으로 협상할 줄 안다는 사실을 고려해보자. 그렇기에 우리는 그렇게 얽매여 있는 상태를 통해 우리의 감정적인 밑바닥에까지 도달할 수 있다. 안타깝게도, 그 얽매인 상태는 우리의 가장 취약하고 민감한 감정 형성 단계에 깊이 아로새겨지기 때문에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는 반드시 우리의 '악의적인' 능력을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우리 자신의 욕망과 달리 이와 같은 가치들을 표현하는 것이 바로 융이 그림자(shadow)라고 칭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반드시 그 가치들을 존중해야 하며, 때로는 그것들이 모순되어 보인다 할지라도 그 가치들로부터의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허락은 두려움에 의해 지배되는 삶이 제대로 된 삶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줄 것이다. 내가 임종을 앞둔 이들을 만났을 때, 대부분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짧은 기간이 더 커다란 삶을 향한 긴급한 소환이라고 결론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그 긴급한 소환을 받기 위해 반드시 죽음을 마주해야 하는 걸까? 그렇지 않기를 바란다.
영혼의 소환은 우리의 인생이 우리 자신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다. 그리고 우리는 허락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직접 찾아나서야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바로 그 더 큰 삶으로부터 우리 자신보다 더 커다란 일을 수행해야 하는 인생이 시작된다. 우리는 그 전환의 순간, 신이 우리를 태초에 만들어낸 그 의도대로의 인생을 되찾게 된다.
융이 이야기했듯, 인생은 두 가지 위대한 신비 사이에서의 짧은 멈춤의 시간이다. 인생에 대해 그가 묘사한 표현보다 더 나은 정의는 없을 것만 같다. 그럼에도 내가 추가로 덧붙이고 싶은 말은 바로 이것이다. 반짝반짝 빛나는 멈춤의 시간을 만드는 것은 그 누구도 아닌, 우리에게 달린 일이다.
15장 같은 일상이 반복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은유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때때로 여러분의 삶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왜 계속해서 반복되는지, 왜 이런 패턴이 생겨나는지 궁금하지 않은가? 자신이나 타인에게 해가 되는 일들이 왜 자꾸만 생겨나는 것일까?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우리는 얼마나 자유로움을 느끼는가?
우리 조상들은 유령이나 죽은 사람들의 영혼, 우주에 존재하는 악의적인 힘, 그와 같은 힘에 지배될 가능성을 믿었다. 그들이 이렇게 믿었던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심리적 에너지가 성격으로 반사되어 눈에 보이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주어진 순간에 작동하는 감정적인 전제가 바탕이 되었을 때 타당한 행동을 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환경, 즉 원가족이나 대중문화, 시대정신과 같은 것들을 파악하기 시작한다. 이를 통해 이 세상이 무엇에 관한 것인지 알고, 우리 자신을 이 세상과 잘 어울리는 사람으로 만들어 안전을 보장하고, 우리가 필요로 하는 만족감을 느끼는 데 필요한 단서를 찾으려 하는 것이다. 합리성이나 상대성, 자립성에 앞서 얻어진 전제들은 위와 같은 행동들을 회피하거나 통제하는 데 순응하도록 만든다. 그런 행동들은 어린 시절부터 서서히 발전했으며, 자아감의 기본 운영방식이 된다.
융은 콤플렉스가 자아의 지배를 침범할 수 있는지 설명할 때 독일어인 'Eingriffenheit(감동된 상태, 감동)', '사로잡힌 상태'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강력한 콤플렉스는 우리를 점령된 도시국가처럼 만든다. 우리는 점령군의 지시를 전력을 다해 반복적으로 이행하며 섬긴다. 또한 콤플렉스 맥락이 없다. 그저 역사적으로 생선된 일종의 프로그램일 뿐이지만, 우리는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이기 때문에 그 패턴은 강화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콤플렉스에 복종할 때마다 콤플렉스의 위력은 더욱 정교해지고 강력해진다.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보다는 우리에게 일어난 일을 우리가 어떻게 내면화하고 그 메시지를 전달하는가에 달려 있다. 영혼을 망가뜨리는 일은 나와 경쟁하는 이들에게 오히려 도움이 될 것이다. 학습된 무기력은 우울증을 정의하는 요소들 가운데 하나다.
우리는 두려움을 극복함으로써 배워야 한다.
16장 불안의 그림자는 누구의 것인가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나 자신이 성숙한 인간이 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우리는 자녀들의 운명이 추구하려고 하는 그들만의 인생 여정을 살아나갈 수 있도록 관대하게 허락하고 본보기를 보여줘야 한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각자의 인생을 충실히 살아나가지도 못하게 될 것이다.
<에덴 프로젝트: 마법의 타자 찾기>라는 책에서 나는 '영웅적 소환(The heronic summons)'이라고 칭했던, 끝나지 않은 나 자신의 인생 과업으로부터 친밀한 타인을 분리하는 일에 대해 썼다. 내가 이 행위를 영웅적이라고 부르는 까닭은 이것이 편안하게 느껴지기보다는 아주 무거운 부담을 지는 일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 행위는 누군가 돌봐주기를 은근히 바라는 의존적인 습성에서 벗어날 것을 우리에게 요구한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각자의 배우자를 좋은 부모로 바꾸려 한다. 좋은 부모는 자녀의 자존감이나 개인적인 책임을 덜어주는 역할을 한다.
이 세상 부모들이 모두 자기 자녀들에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해줄 수 있을 정도로 건강하고, 현명하며, 성숙한 부모들이라면, 나는 이 세상의 역사가 바뀔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너는 정말 대단한 아이란다. 너는 진정한 네 자신이 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난 거야. 네가 하는 선택들이 다른 이들에게도 영향을 미칠 수 있으니 그 선택의 결과를 항상 잘 따져보도록 해. 나는 나만의 여정을 살고 있으니 네가 나에 대해 걱정할 필요는 없어. 너는 네 안에 있는 강력한 힘의 원천을 따르도록 해. 네 본능이나 직관, 직감과 같은 것들 말이야. 이것들이 네게 있어 옳은 것은 무엇인지 늘 알려주게 될 거야. 인생은 정말이지 간단한 거야. 네게 옳은 일을 한다면, 그것이 너 자신과 다른 사람 모두에게 좋은 거야. 만약 네게 적절하지 않은 일을 한다면, 그건 너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도 옳지 않은 일일 거야. 우리는 복제 인간이 아니라 모두가 각기 다른 사람들이기 때문에 우리가 항상 모든 일에 동의할 수는 없고, 그래도 괜찮다는 사실을 알아야 해. 언제든 이 사실만은 꼭 알아둬. 네가 어떤 선택을 하든지 나는 너를 존중할 거고, 너를 소중히 여길 거야. 그리고 너를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들이 항상 이자리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렴."
17장 영혼은 우리를 어디로 안내하는가
우리의 그림자에 대해 알고 그와 마주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중요한 문제다. 그림자와 마주하게 되면 자기도취적인 행동을 보이는 이유와 비겁한 퇴보 현상, 그리고 우리의 가치를 손상시키는 실수들에 대해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여전히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에 대한 죄책감에 사로잡히지 않아야 함을 의미한다.
알렉산드리아의 신학자 필로는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 모두가 각자 아주 커다란 문제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반드시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해야 한다"고 2,000년 전에 말했다.
우리의 그림자에 대해 무언가를 배울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 중 하나는 바로 우리를 정말 잘 알고 있는 사람들, 즉 우리와 함께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물어보는 것이다. 우리의 무엇이 이들을 괴롭히거나 상처를 주고 방해하는지 알려달라고 부탁해보라. 많은 이들이 이와 같은 잠재적인 고발장을 받으려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관계 속에서나 자녀들을 통해서, 우리 시대의 병리학에 대해 우리 자신도 모르게 이바지하는 부분들 때문에 이와 같은 일들이 매일 매일 생겨난다.
그림자에 관한 가장 큰 문제는 여전히 우리 눈앞에 놓여 있을 것이다. 대부분이 저항하고 합리화해버리며 피하려고만 하는 가장 큰 그림자는 바로 이루지 못한 삶이라는 사실을 나는 알게 되었다. 우리가 앞서 살펴본 것처럼, 융은 자녀의 가장 큰 부담은 바로 부모가 이루지 못한 삶이라 언급했다. 나는 우리 영혼이 져야 할 가장큰 짐 역시 이와 마찬가지로 이루지 못한 삶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내면의 무엇가를 우리에게 무엇이 옳은지, 어떤 길이 우리가 가야 할 길인지 알고 있다. 내면의 무언가는 우리가 안주하고 있는 곳에서 성장과 발전의 길로 우리를 이끈다. 우리가 지금껏 살아오면서 도달한 지점보다 더 나은 곳으로 이끌어준다.
고대인들의 용어를 빌리자면, 우리 모두에게는 '정령(daimon)'이 존재한다. 정령이란 주동자와도 같고, 우리를 통해서만이 아니라 세상을 통해서 연결되는 보다 큰 에너지와의 연결고리이기도 하다. 고대인들이 이해한 대로, 정령은 수호의 정신이자 인간과 우주를 연결하는 연결고리였다. 우리 모두는, 특히 어린 시절에, 이와 같은 경험을 해본 적이 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 설득하는 그 목소리를 듣게 되면 마치 위협처럼 느껴진다. 정령의 목소리가 우리에게 너무나 많은 것을 요구하는 것처럼 느껴지고, 우리가 안주하던 공간으로부터 빠져나올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순간에 우리는 내면의 목소리를 따르는 일을 연기하거나 억압하거나 다른 곳으로 정신을 돌린다.
"우리의 영혼이 원하는 바는 과연 무엇인가?"
우리의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들은 우리를 인간적인 존재로 만들어주고, 품위와 사랑을 얻을 자격이 있는 존재로 만들어준다. 오로지 인정받는 품위와 치유의 힘이 있는 사랑만이 우리를 보다 더 큰 영혼의 삶으로 이끌어줄 수 있으며, 영혼의 풍족함에 대한 비난이나 폄하를 하지 않도록 해준다. 게다가 역설적이게도, 우리의 자아의식이 다른 사람을 향했을 때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까지도 사랑하는 행동을 취해야만 우리는 다른 사람들 또한 사랑할 수 있다.
이렇게 다른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일은 우리 안에 내재하고 있는 타인을 인정하는 그 지점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나 자신에게 이렇게 하기 위해 아직도 노력하고 있는 상태다.
18장 일, 의무, 소명의 차이는 무엇인가
우리에게는 반드시 책임져야 할 의무가 있다. 예를 들면, 우리의 직업이나 배우자에 대한 의무 같은 것들이다. 우리에게는 소명에 대한 의무 또한 있다. 그렇다면, 이 두 가지의 차이점은 무엇이며 어떻게 그 차이를 구분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 나는 줄곧 하나 이상의 직업을 동시에 가져왔다. 지금껏 가져왔던 다양한 직업들이 각각 내 정신과 영혼에 활력을 불어넣어줌으로써 한 편의 이야기가 완성되어가고 있다. 의무는 다른 사람들의 정당한 요구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의무란 우리 사회를 지속시키는 방법이다. 나는 심신의 괴로움을 겪으면서도 매일 아침 일어나 각자의 일터로 떠나는 모든 이들을 존경한다. 이들은 소로우가 말한 '조용한 절망의 삶'을 향해 갈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들은 자기 자신과 이들의 보살핌이 필요한 가족들의 삶을 부양하고 있다.
그들은 모두 자신들의 의무를 다 하고 있다.
융은 대부분의 신경증과 고통스러운 내면의 분열은 우리가 정당한 의무들 가운데 오직 하나만 선택해야 하는 상황을 경험하게 되기 때문에 생겨난다고 했다.
우리는 언제든 어려운 선택에 직면하고, 살면서 상당한 고통을 겪게 되는 때도 많다. 융은 다시 한 번 이 같은 종류의 딜레마에 대해 언급했다. 아무 생각 없이 A나 B를 선택하는 일은 다른 한쪽의 정당한 주장을 위반하는 일이 된다. 융의 조언은 우리가 견딜 수 있는 한 자신의 내면에서 양 극단의 긴장을 견뎌내고 '제3자'가 출현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제3자는 무엇일까?
우리의 의무에 각각 정당한 권리를 부여하는 A와 B 사이의 선택에서 제3자는 분별력을 나타내며, 그 선택은 보다 발전적인 여정으로 우리를 소환한다.
우리는 외부로부터 또 다른 결론을 내리도록 지시할 수는 없다. 일반적인 생각과 달리 '결혼생활을 유지시켜주는 일'은 심리치료사가 해야 할 일이 아니다. 심리치료사의 의무는 양측이 실제로 겪은 고통과 분별하기 어려운 감정을 식별함으로써 제3의 방법이 무엇인지 파악하도록 돕는 것이다. 양측이 이 과정을 충실히 이핼할 경우, 대부분은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동의하게 된다. 발전적인 방법을 계속 찾아가거나 양측에 대한 이해와 믿음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것. 우리 모두는 포기나 실망감에 대한 콤플렉스를 갖고 있다. 하지만 심리치료사들이 가장 잘할 수 있는 부분은 고통받고 있는 양측에게 상대방에 대한 의무가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영혼에 대한 의무 또한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도록 돕는 일이다.
우리가 영혼을 직업과 의무가 혼재된 것으로 여길 때 소명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다. 소명은 라틴어인 'vocatus'에서 유래된 것으로 '소집'이나 '호출'을 의미하는 단어다. 자아의식은 소명을 호출하지 않고 대신 자아나 그 사람 자체가 호명된다. 과연 무엇으로부터 호명되는 것일까? 하느님이나 자연, 혹은 영혼으로부터일까? 여러분이 선호하는 은유를 적용해보라.
내면의 대화, 목소리, 내면아이, 무의식, 그분
호명된다는 것은 연약하고 긴장된 상태인 자아의식이, 어느 순간에나 그러하듯, 고정되어 있거나 흐르는 상태로 보다 더 큰 맥락에서 늘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막 어른이 된다는 것은 어두운 바다 위를 떠다니는,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코르크 마개처럼 조그만 공간 위에 우리의 자아가 서 있으며, 우리가 책임져야 하는 거대한 소환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일이다. 선택의 모든 순간에 우위를 갖게 되는 것은 결국 자아다.
비록 우리의 무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지라도, 모든 시스템과 윤리, 법률 지식, 도덕적인 시각은 개개인에게 행위의 책임이 있다고 판단한다. 나는 판사에게 "그건 제 무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니 그에 대한 책임이 제게는 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이 세계와 우리의 일상생활에 각각 책임이 있으며 우리 자신의 영혼에도 책임이 있다. 우리가 하는 이질적인 주장들은 일치할 때도 있고, 또 다른 때는 우리에게 상당한 고통을 주기도 한다.
직업을 갖는 것은 우리의 소명에 대한 의무다. 때로 운 좋게도 어떤 사람들에게는 직업과 의무와 소명이 한 가지 형태로 존재한다. 나도 그처럼 운 좋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다. 항상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수년간 직업, 의무, 소명 이 세 가지가 하나의 형태로 존재해왔다. 매일 나는 그에 대해 감사한다. 생계를 유지하도록 해주는 내 직업, 내가 사는 이 세상에 기여할 수 있는 나의 의무, 수업이나 책, 심리치료 등의 형태로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는 나의 소명 모두가 지금은 하나의 촘촘한 그물망처럼 엮여 있다.
지금은 가난하게 자란 아이도 교육의 힘이나 각자의 노력을 통해 조상들이 경험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만족스러운 삶을 만들어낼 수 있는 시대다. 이런 시대에 태어난 나는 지금껏 내게 허락된 특권을 평생 잊지 않을 것이다. 이 세상에 존재했던 모든 인류가 이 같은 기회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융이 언급한 개성화라는 개념은 이런 관점에서 영혼에 대한 의무를 의미한다. 우리가 받아낸 허락은 자아도취적 방종과 시공간적 규범에 대한 (정신을 온전히 지키는) '저항'을 통해서가 아니라 진정한 소명이 일반적으로 요구하는 (언제나 고통을 수반하는) '희생'을 통한 것이다. 융에게 개성화는 자아의 주권에 관한 것이 아니라 희생에 관한 것이다.
그렇다면, 희생되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자아의 위안과 평탄하지만 낡은 길이다.
그가 쓴 편지 가운데 하나를 보면, 그는 그 끔찍한 시간과 장소에서 하나님께 자신을 체포한 사람들로부터 자기를 구해내달라고 기도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하나님이 그에게 요구한 방법대로 행함으로써 자신이 용기와 통찰력을 가질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가 그런 모습을 보였던 것과 자기 영혼의 진실을 증명해보였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는 오늘날까지도 그와 그처럼 커다란 영혼을 지닌 수많은 이들을 존경한다. 우리 대부분은 그처럼 극적인 삶을 살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매일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 결정해야만 한다. 그리 오래 생각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일상의 적당한 의무가 삶을 지속시켜나가도록 내버려둘 수 있다. 콤플렉스들이 지금껏 우리를 위해 프로그래밍 되었던 그 방식 그대로 전개되도록 가만히 둘 수도 있다. 우리가 결코 더 커다란 삶의 편에 서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해내야만 하는 의무에 무엇이든 기여하게 될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의 진정한 의도는 우리를 세상에 맞춰 나가는 것도, 평범한 사람이 되는 것도, 다른 누군가의 삶을 모방하는 것도 아니다. 결국 이미 그렇게 되어버린 일을 왜 우리가 반복해야 하는가? 개성화는 우리를 성장하도록 하고, 개인적인 특성에 맞춰 살아가도록 하며, 훌륭한 사람이 되도록 하는 명령이다.
개성화는 각자의 고유성으로 인해 세상에 완벽하게 들어맞지 않는 우리 자신이 이 세상에 기여할 수 있도록 함을 의미한다. 우리가 소명을 우리의 영혼처럼 버리거나 그로부터 달아나고 피하거나 교묘하게 처리할 때, 그것이 얼마나 자그마한 일부이든 관계없이, 역사의 모자이크 조각 하나가 빠져나가 버리게 된다.
우리 모두는 영혼이 요구하는 바가 무엇이며, 아무리 위험한 길이더라도 우리에게 어떠한 길이 가장 옳은 길인지 잘 알고 있다. 때로 부적절하거나 심지어 망가진 방식임에도 그렇게 살고자 노력하면서 우리가 알고 있는 바에 대응하는 일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전부다. 우리가 자립하며 살도록 하기 위해 삶은 우리에게 직업을 갖도록 하며, 서로를 연결하기 위해 의무를 요구한다. 그리고 인간이라는 종이 그 시작을 열었으나 아직은 다다르지 못한 긴 여정에 우리 각자가 엄청난 풍요로움을 기여할 소명을 요구한다.
19장 성숙한 영성은 가능한가
영성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서 의미가 가장 불분명한 용어들 가운데 하나다. 영성의 의미는 무엇일까? 종교라는 용어와는 어떻게 다른가? 영성과 종교는 같은 의미인가, 아니면 상충되는가? 어떻게 우리는 영성을, 특히 성숙한 영성을 식별할 수 있을까? 과연 누가 이에 대해 판단할 수 있을까?
인간 프로젝트(The Human Project)는 신비로움에 휩싸여 있다. 우리는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향하고 있으며, 그 사이 어딘가에서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이런 질문들은 시대를 초월한 보편적인 것들이다. 우리는 이 문제들을 스스로 해결하도록 요구받았다. 만약 우리가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 주변의 압력에 자동적으로 따르게 되거나 다른 누군가에게 우리의 권한을 넘겨주게 된다.
우리가 각자의 신비를 마주하게 될 때마다, 그리고 우리 안에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마주하게 될 때마다 영성은 나타난다.
우리에게는 또 다른 삶이나 또 다른 우주가 필요하지 않다.
바로 지금 우리의 삶을, 우리의 우주를 탐험하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성숙한 영성은 다음의 다섯 가지 부분을 통해 나타날 수 있다.
첫 번째는 현대 사회와 포스트모던 사회의 본성을 통해 나타난다. 이 시기는 한때 부족의 책임이었던 것을 우리가 원하던 원하지 않던 이제 각자가 알아서 책임져야 하는 때다. 이러한 책임을 피하는 일은 스스로로부터 도피하는 것이며, 다른 이들로부터 얻은 권위에 복종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첫 번째 시행착오 시도 과정은 공명의 원칙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공명이란 '소리의 울림'을 의미한다. 우리가 다른 누군가의 옷을 입어볼 때, 그 옷이 꼭 맞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또한 그 옷이 잘 어울릴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는 남의 코트를 바꿔 입어볼 수는 있지만 우리에게 잘 맞는다는 느낌이 들지 않으면 다른 누군가의 코트를 선뜻 입으려 하지 않는다.
만약 우리에게 잘 들어맞는 것이라면 울림이 생겨난다. 만약 잘 맞지 않는 것이라면, 울림이 생겨나지 않는다. 우리는 울림이 생겨나도록 하기 위해 애를 쓰면서 우리 자신을 설득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시간이라는 시험을 통과하지 못할 것이다.
과거에 울림이 생겨났던 것처럼 보이는 일들이 현재에는 종종 멈춰있다. 그렇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피상적이고 유혹적인 세속의 이미지로 향하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무언가가 진정으로 우리 안에서 울림을 주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적어도 지금으로서는, 옳은 일일 것이다.
내일은 내일에게 답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어제의 신념을 버린 것은 두려워할 일도, 죄책감을 가질 일도 아니다. 공명이 생겨났는지 아닌지에 대한 정직함에 대한 일이다. 우리가 그것을 결정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이 우리가 그러한 선택을 하도록 만든 것이다.
두 번째, 진정한 영성은 신비한 존재를 가능하게 해준다. 이는 우리의 자아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약속을 간청하는 것이다. 심지어 충격적인 경험 또한 때로 신비한 것이 될 수 있다. 이러한 경험이 우리를 놀라게 하고 우리에게 자아감과 세계에 대한 감각을 재구성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세 번째, 성숙한 영성은 우리가 신비에 마음을 터놓게 한다. 확실성이란 순진하고 겁먹거나 둔한 사람들의 사치다. 이는 편안함보다 불확실성을 더 많이 안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불안하더라도 내 방식이 아니라 그들의 방식으로 삶과 죽음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네 번째, 성숙한 영성은 내가 성장할 것을 요구한다. 겁에 질린 아이의 모습, 즉 순응하는 태도로 우리는 대부분의 결정을 내린다. 어떠한 소심함을 우리가 인생에서 마주하게 될 것인지 알고 있으며, 우리가 결정한 바에 대해 어떠한 의문을 품게 될지도 우리는 알고 있다. 또한 우리의 상상 속에서 마법처럼 움직이는 소망을 아이 취급하고 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적어도 성장한다는 것은 우리가 자신의 삶에 대한 완전한 책임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모두는 여전히 마법 같은 다른 사람이 아닌, 우리의 요구를 충족시킬 책임이 있다. 마법 같은 타인은 우리를 위해 대신 나서서 고쳐주고 삶의 짐을 덜어주며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모두 설명해준다. 또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주며, 만약 우리가 진짜 행운아였다면 우리가 결국 성장할 필요도 없도록 우리를 돌봐줄 사람을 의미한다.
다섯 번째, 우리의 신념과 관행은 그것들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그 어떤 자기중심적 혹은 유혹적인 확실성에 의해 측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신념과 관행이 우리에게 신비에 마음을 터놓게 하든지, 아직 전개되지 않은 우리의 여정에 깊이 관여하는지에 의해 측정된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확실성 없이 성장할 것과 최선을 다해 실천할 수 있는 가치를 수행하며 일상을 살 것을 요구한다.
"그 누구도 궁극적인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 그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만약 그와 같은 경험이 삶을 보다 건강하고 아름다우며 완벽하게 만들도록 도와주고 여러분 자신과 여러분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보다 만족시킬 수 있다면, 여러분은 '이것이 바로 신의 은총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타인들의 경험들은 때로 우리를 안심시키기도 하고, 우리를 놀라게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들이 우리의 이야기를 재구성하도록 강요하거나 우리가 이해하는 바를 바꾸도록 하거나 새로운 것으로 우리를 좌절시킬 때마다 우리는 신비에 싸여 존재하고 있다."
이는 쉬운 일도 유쾌한 일도 아니지만 어린아이 취급과는 반대되는 일이며, 우리의 자기도취적 문제들을 인정하는 것과도 반대되는 일이다. 이는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하거나 쇠퇴하고 있는, 아직 전개되지 않은 신비의 한가운데 우주와의 만남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우리는 이 여정의 신비를 그대로 받아들이거나 그것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다. 우리 안에 있는 무언가는 그 차이를 이미 알고 있으리라.
20장 내가 누군지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내적 분열이 생기는 이유 중 하나는 이 명백한 일을 책임지려는 엄청난 저항이 콤플렉스에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우리를 똑같은 과거로 계속해서 데려가는 개인사에 우리는 계속해서 저항하려고 한다. 매번 그 개인사를 마주할 때마다 '이것이 당신의 역사이며, 당신이 바로 당신 역사 그 자체다. 당신의 역사가 미래를 위한 당신의 지침이며, 당신의 운명에 얽힌 역사는 당신의 운명에 의한 결과다'라고 우리에게 속삭인다. 정신병리학이 없었다면, 즉 내면으로부터의 설명을 재연할 수 없었다면 우리는 이 어두침침한 결정론에 동의해야만 했을 것이다. 하지만 정신병리학, 다시 말해 '고통에 대한 영혼의 표현'은 우리가 이 세상에 적응하는 데 강력한 반박을 가능하게 한다.
성장하고 싶다면 우리는 자기결정권의 초대에 응해야만 하며 내면의 목소리와 대화를 나눠야하고 진정한 여정의 소환에 답해야만 한다.
이 모두는 세상에 맞춰나가야 한다는 지침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성장이란 내가 나 자신의 삶과 내가 한 선택, 그리고 그 결과에 책임을 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선의"라고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이와 같은 선택들은 나로부터, 내가 고백한 가치들로부터, 내가 뽑은 정치인들로부터, 내가 단언한 모호한 선택들로부터 생겨난 것이다. 내 앞에 나타나서 그 모두에 대해 설명해줄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다. 내가 스스로 그 일에 대해 알아내야 하며, 시행착오나 때때로 겪는 고통을 통해 그 안에서 확인된 길이나 친구들, 가치들, 생활방식을 찾아야 한다.
그 누구도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정말로 알지 못한다.
우리는 성장하면서 나 말고 다른 어느 누구도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를 기대한다. 또한 외부의 권위자도 콤플렉스와 무의식적인 매커니즘에 적어도 우리들만큼 휘둘린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한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그 문제에 대해 스스로 알아내야만 한다. 우리들 중 과연 몇 명이나 우리 자신이 되는 일을 허락받길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것은 이미 우리의 내면은 알고 있는 사실이다. 때로 삶의 환경은 우리가 내면의 권위를 믿는 위험을 감수할 것을 요구한다. 심리치료사는 심리치료 과정 중 때로 권한을 부여하는 인물인 부모의 그림자를 구체화시킨다. 하지만 이 방법도 늘 효과가 있는 것은 아니다.
결국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나 그리 오래 머무르는 것이 아니며, 우리가 살아온 혹은 살지 못했던 삶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것을, 즉 기본적인 사항들을 이해하고 다시 되짚어봐야만 한다. 우리에게는 현생을 살면서 선택과 용기, 인내를 가져야 할 의무가 있다는 사실 또한 직시해야 한다. 이러한 사실을 인정함으로써 허락에 대한 필요성은 보다 더 명백해진다. 이는 우리가 숨을 쉬는 데 반드시 필요한 산소가 된다. 아니면 우리는 살아보지 못한 삶의 연기로 인해 질식사할 수도 있다.
"이것이 당신의 인생인가요, 아니면 다른 누군가의 인생인가요? 여러분은 당신의 인생에 책임을 지고 있습니까?"
오직 우리의 용기와 결심만이 필요하다. 우리가 그런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면 바로 우리 앞에 가능성 있는 삶이 열리게 된다.
21장 성찰하는 삶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고통은 피하며 쾌락을 추구하고자 애쓰는 동물이지만, 동시에 자아성찰 능력을 갖고 있다. 또한 대부분이 그러하듯 신경과민증에 걸린 사람과 우리 자신을 별개로 여긴다. 따라서 우리는 스스로 문제를 자각할 수 있고, 그 방향을 바꿔나갈 수 있다.
사실 우리는 그동안 우리가 들었던 대답들이 아니라, 우리가 던졌던 질문들을 통해 더욱 성장해왔던 것이다. 세상은 이미 충분한 답을 갖고 있었다. 대답이 부족했던 것이 아니라 그 대답이 이제 더 이상 들어맞지 않게 된 것이다.
셰익스피어가 이야기했듯, 우리가 살아보지 않은 곳보다 더 감옥 같은 곳은 없다. 훌륭한 영혼들은 부지런히 과거에 이해한 바를 새로운 삶의 지형에 계속해서 적용시키지만 증상은 강화된다. 새로운 지형이나 이 여정의 새로운 단계가 요구하는 바는 바로 아직 알려지지 않은 부분들이다. 따라서 우리는 때때로 그 사이에서 힘든 과도기를 겪게 된다.
진실한 믿음을 갖고 접근할 때, 일반적으로 이 과정이 효과를 발한다. 우리가 그것을 기다릴 수 있을 정도로 겸손한 상태가 될 때 영혼의 깊은 곳에서부터 나타나는 새로운 계획이 항상 존재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주변 사람들의 이해나 지지에 상관없이 우리가 갖고 있는 최고의 빛을 발현시키면서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일들을 하며 이 삶을 살아가는 일이다.
계속해서 정신이 산만해지는 것에 유의해야 한다. 어떤 이들은 당위적으로 해야 하기 때문에 그 약속을 겉으로 드러내고 지켜나간다. 그 약속을 지키는 일은 대답 속에서가 아니라 영혼의 크기에 걸맞은 커다란 질문들 속에서 삶의 목적을 찾는 일이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성찰하는 삶이 중요한 이유다.
이 여정에는 수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고, 결국 무덤에서 끝이 난다. 그렇다. 우리 모두는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스스로의 빛을 통해 만들어나가야 한다. 그러나, 간혹 보이지 않을 때도 있지만, 이 여정을 함께하고 있는 동료들이 수없이 많다. 이 세상은 여러분들처럼 사려 깊은 영혼들이 모여 있는 훌륭한 곳이기에 여러분은 외롭지 않다. 따로 또 같이, 우리의 삶은 소중하며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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