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와 접힌 질서>

2023. 8. 22. 04:00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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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사람들이 무언가를 생각할 때는 그것을 정지된 이미지 혹은 정지된 일련의 이미지로 이해한다.

하지만 실제로 운동을 관찰하면 결코 끊기거나 나뉘지 않는 흐름을 느낀다.

이 흐름을 생각 속에 고정시킨 이미지는 달리는 차를 찍은 스틸 사진과 비슷하다.

철학자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이 문제를 제논의 역설로 제기했지만 아직 만족스러운 답을 얻지 못했다.

 

여기에 덧붙여 사고와 실재는 무슨 관계인가라는 질문이 있다.

주의깊게 살펴보면 사고 또한 움직이는 과정에 있다.

다시 말해 일반적 물질 운동과 별 다르지 않은 흐름을 '의식의 흐름'에서도 느낄 수 있다.

그렇다면 사고 또한 실재의 한 부분이 아닐까?

그렇다면 실재 안에서 한 부분이 다른 부분을 '안다'는 말은 무엇을 뜻하며 어느 정도까지 알 수 있을까?

 

서양 전통에는, 생각하는 이(자아)가 생각의 대상인 실재와 따로 떨어져 독립되어 있다는 생각이 강하게 박혀있다.

하지만 앞서 살펴본 운동 경험과 사고를 담당하는 뇌의 본질과 기능에 대한 현대 과학 지식에 따르면, 사고와 사고 대상은 명확히 구분하기 힘들다.

여기서 우리는 어려운 문제에 직면한다.

어떻게 끊임없이 흐르는 실제 사태를 하나의 전체로 그것도 사고(의식)와 우리가 경험하는 외부 실재를 포함하는 전체로 생각할 수 있을까?

 

우리 사이에 널리 퍼진 (인종, 국가, 가족, 직업 등으로) '사람들을 구분하는 습관'은 인류가 추구하는 공동선만이 아니라 인류의 생존까지 방해한다.

이러한 구분은 '사물'이 원래부터 더 작은 구성 요소로 나뉘고 쪼개졌다고 보는 우리의 생각에서 시작됐다.

각 부분이 원래부터 따로 떨어져 홀로 존재한다고 여기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전체를 생각하는 방식(세계관)이 우리 정신 질서에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전체가 독립된 조각으로 이루어졌다면 그 사람의 정신도 조각나고 만다.

반면 모든 것을 일관되고 조화롭게, 경계나 분할 없는 전체 안에 아우를 수 있다면, 정신 또한 비슷하게 작동하며 이로부터 전체를 염두에 둔 질서 있는 행동이 나올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요소가 세계관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감정이나 신체 활동, 인간 관계, 사회 조직과 같은 여러 다른 요소에도 눈을 돌려야 한다.

하지만 지금은 일관된 세계관이 없기 때문인지, 그러한 문제가 인간 정신이나 사회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아예 잊곤 한다.

그 시대에 맞는 적절한 세계관은 개인과 사회를 조화롭게 하는 데 꼭 필요한 요소이다.

 

1. 전체와 조각내기

 

조각내는 습관이 개인과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오늘날, 이 문제를 생각해보는 일은 특히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조각내기는 정신을 크게 어지럽히며 끊임없이 문제를 만든다.

또 명쾌한 인식을 방해해 그러한 문제를 더욱 풀기 어렵게 한다.

사람들은 예술, 과학, 기술, 그리고 인간사 전체를 여러 전문 분야로 나누고, 이들이 원래 그렇게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다른 욕망, 목적, 야망, 충성심, 기타 심성에 따라 서로 충돌하는 부분으로 너무나 많이 나뉘어져 어느 정도 신경증은 감수해야 하며, 조각난 상태라는 정상적인 선을 넘어서려는 사람들은 편집증, 분열증, 정신 이상 등으로 분류된다.

이렇게 모든 조각이 분리되어 있다는 생각은 분명 환상인데도 이러한 환상이 끝없는 충돌과 혼란을 낳고 있다.

실제로 세상이 조각으로 분리되었다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이, 오늘날 긴급한 위기 상황들이 점점 더 증가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물론 문제를 다룰 수 있는 크기로 축소하기 위해 어느 정도 사물을 나누고 분리해 생각하는 일은 충분히 필요하고 적절하다.

하지만 자신을 환경에서 떼어내어 생각하고 사물을 나누고 쪼개는 사고방식으로 다방면에서 유해하고 나쁜 결과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고 분할 방식을 맞지 않는 영역까지 확장하여 적용했기 때문이다.

원래 분할이란 주로 실용 기술이나 기능 영역에서 편리하고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사물에 대한 사고방식'이다.

 

하지만 이런 사고방식을 자기 자신이나 전체 세계에 확대 적용하면서 자아관 세계관 분할을 그저 편리한 도구로 보지 앟ㄴ고, 자신과 세계가 실제로도 그렇게 조각났다고 믿고 경험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조각난 자아관 세계관에 따르면 자신과 세계를 쪼개는 식으로 행동하게 되며 마침내 모든 일이 마치 자기 사고방식과 척척 맞는 듯 보일지 모른다.

이로써 조각난 자아관 세계관을 입증한 듯 보이지만 실제로 조각을 낸 장본인은 바로 그런 사고방식에 따라 행동하는 자신임을 잊은 것이다.

그리고는 조각들이 자기 의지나 소망과는 상관없는 원래 독립된 존재라고 여긴다.

 

아득한 옛날부터 조각나 보이는 상태를 깨달은 사람들은 인간과 자연 또는 인간과 인간이 쪼개지기 전에 '황금시대'가 있었다는 신화를 지어내기도 했다.

사실 이들은 언제나 정신, 육체, 사회, 개인 차원에서 전체성을 희구해왔다.

 

"가치 있는 삶이란 전체성 또는 온전함이 함께 해야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조각난 삶을 살고 있다.

당연히 우리는 왜 그렇게 되었는지에 대해 주의 깊고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있는 그대로 기술한다는 습관 때문에 우리는 사고와 대상이 직접 대응하는 것처럼 생각한다.

우리의 사고에 차이와 구별이 가득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그런 습관은 분할을 실제로 구별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면서 세계가 실제로도 조각났다고 보고 느끼게 된 것이다.

하지만 '사고'와 사고 대상인 '실재' 사이에는 단순한 대응 관계를 넘어서 훨씬 복잡한 무언가가 존재한다.

이론이란 무엇보다 세계를 바라보는 하나의 방식인 '통찰 방식'이지 세계가 어떻가는 지식 또는 앎의 방식이 아니다.

 

과거 이론이 어떤 시점부터 거짓이라기보다 새로운 통찰이 끊임없이 생겨나 어느 때까지 명확하다 점점 불확실해진다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이 과정에서 최종 통찰 방식이 있다거나 또는 이에 점점 더 다가간다고 간주할 만한 이유는 없다.

오히려 문제의 성격상 새로운 통찰 방식들이 끝없이 펼쳐진다.

이론들은 사물에 대해 절대적으로 참인 (또는 참에 점점 다가가는) 지식이 아니라 세계 전체를 바라보는 여러 방식(세계관)으로 생각해야 한다.

 

지각이나 행동에서 얻어진 사실을 지식으로 조직하려면 '이론'을 통해 이해해야 한다.

실제로 우리 경험 전체가 이런 식으로 틀이 잡힌다.

모든 경험은 사유 범주인 시간, 공간, 물질, 실체, 인과, 우연, 필연, 보편, 특수 따위에 대한 사고방식을 기준으로 조직된다..

이 범주야말로 모든 사물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일반적인 방식이며 따라서 일종의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명료한 지각과 사고를 위해서는 우리의 사고방식에 숨어 있거나 혹은 두드러진 이론을 빌려 이해하는 일이 우리 경험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알아야 한다.

이를 위해 나는 지식이란 이와 분리된 경험에 대한 것이 아니며 지식과 경험이 단일한 과정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항상 변화하는 통찰 방식인 '이론'이 우리 경험의 틈을 만든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면 우리의 시야는 좁아질 것이다.

이론적 통찰로는 기존 한계 너머의 새로운 사실을 밝히지 못할 수 있다.

그것은 이론이 실재에 대한 참인 지식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분명 근대적 사고방식은 고대와 많이 다르지만 둘에는 중요한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근대와 고대 모두 그들의 이론이 '실재 그 자체'에 대해 참인 지식이라는 관념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당시의 이론을 통해 지각한 형태나 모습을 실재라고 혼동한다.

이로 인해 우리는 자연, 사회, 개인을 고정된 좁은 틀(사고) 안에서 바라보며 이런 제한된 틀을 경험 속에서 계속 확인하는 것이다.

좁은 틀을 확인하는 일은 특히 조각내기 문제와 관련해 중요하다.

앞서 이야기한 대로 모든 이론적 통찰은 나름대로 본질이라고 생각하는 차이와 구분을 끌어들인다.

 

여기서 나는 전체성이야말로 현실이며 조각난 현실은 조각의 환상에 사로잡힌 인간의 행동에 대해 전체가 반응한 결과임을 밝히고자 한다.

다시 말해 전체가 현실이기 때문에 조각내는 행동은 반드시 조각난 현실을 낳는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조각내는 사고 습관을 깨닫고 주읠르 기울여 이를 그만두는 일이다.

그러면 실재에 대한 접근 방식이 전체가 될 수 있고 그 반응 역시 전체가 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사고 활동을 원래 모습대로, 곧 통찰 방식으로 봐야지 '실재를 그대로 베낀 것'으로 보면 안 된다.

분명 서로 다른 통찰 방식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이때 사고를 통합하려 하거나 통일성을 강요하면 안 된다.

그렇게 강요하는 관점 자체가 또 다른 조각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다양한 사고방식 모두를, 단일한 실재를 다르게 바라보는 방식으로 각각이 명확하게 잘 들어맞는 영역이 있다고 인정해야 한다.

이론은 사실 어떤 대상을 바라보는 특정 관점이라 할 수 있다.

관점들 하나하나는 대상의 어떤 한 측면을 보여주지 대상 전체를 드러내지는 않는다.

대상 전체는 어느 한 관점으로 이해될 수 없으며 이 모든 관점에 비친 단일한 실재라고 함축적으로만 파악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이론을 일종의 관점으로 마음 깊이 이해한다면 실재를 분리된 조각으로 보고 행동하는 습관에 빠지는 일을 없을 것이다.

반면 이론이 "실재를 있는 그대로 기술한다"고 여긴다면 사고나 상상 속에서 실재란 조각들의 집합 정도로 보일 것이다.

 

어떤 물리 이론이든 간에 이를 절대 진리로 받아들이는 순간, 물리 세계에 대한 생각은 굳어지고 조각내기가 진행된다. 

특히 원자론은 그 내용 때문에 조각내기가 진행된다.

다시 말해 자연 세계와 뇌, 신경계, 정신을 포함하여 인간까지도 분리된 원자 집단의 구조와 기능으로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다고 보는 내용 때문이다. 

원자론이 실험이나 일상 경험에서 입증된다는 사실은 이 개념이 참이자 보편 진리라는 증거로 제시되었다.

이로써 거의 모든 과학이 실재를 조각내는 방법 아래 놓이게 되었다.

 

고대에는 형성원인 개념이 생명과 우주 전체와 똑같이 마음에 있다고 보았다.

실제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주가 하나의 유기체이고 그 안의 여러 부분은 관계 속에서 생장하고 발달하면서 그에 걸맞은 위치와 기능을 갖추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마음의 형성원인을 현대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의식 흐름을 살펴보자.

의식 흐름에서는 먼저 여러 가지 생각의 형태를 식별할 수 있다.

이 생각들은 습관이나 조건에 따른 연상 작용을 통해 마치 기계처럼 굴러간다.

분명 그런 연상에 따른 변화는 사고의 구조 밖에서 작용인과 같은 일을 한다.

하지만 무엇에 대한 '이유'를 안다는 것은 이런 식의 기계적 활동이 아니다.

오히려 각 부분이 전체에 동화되어 서로가 내부에서 연결된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다.

이성 활동은 이미 알려진 이유를 그저 연상하고 반복하는 일이 아닌 마음으로 지각하는 일이며 어떻게 보면 예술적 지각과 비슷하다.

 

조각내는 자아관 세계관에 따르면, 우리는 자신과 세계를 자기 사고방식대로 조각내는 일밖에 하지 못한다.

조각내기는 세계에 대한 분리나 분석을 타당한 영역으로 확장하려는 시도이지만 진정 나눌 수 없는 것을 나누려고 애쓰는 것이다.

조각내기의 다음 단계는 실제로 합칠 수 없는 것을 합치려는 시도이다.

이것은 사회에서 사람들을 무리 짓는 일에서 특히 선명하게 드러난다.

이 무리 짓기 때문에 구성원들은 자신이 나머지 세상과 다르며 구분된다고 느낀다.

하지만 실제로 구성원들은 전체와 연결되어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집단으로 나누기는 실패하게 마련이다.

한 집단 안에서도 구성원 나름대로 각기 전체와 다르게 연결되어, 언젠가 이 차이는 자신과 다른 구성원의 차이로 드러난다.

이렇게 사람들이 사회에서 자신들을 떼어내 어떤 집단을 중심으로 뭉치려 할 때마다 그 집단은 내부 갈등을 겪고 결국에는 와해되고 만다.

마찬가지로 실용 기술과 관련된 일에서 자연을 조각내려 하면 비슷한 모순과 부조화가 발생한다.

같은 문제가 자신을 사회에서 떼내려는 개인에게도 발생한다.

개인 스스로가, 인간과 자연이, 그리고 사람들끼리 진정으로 하나가 되려면 전체로서 온전한 실재를 결코 조각내지 말아야 할 것이다.

 

조각내는 사고방식이나 관점, 행위는 분명 인생사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조각내기는 '다름'과 '같음'을 혼동하여 발생하는 문제이다.

인생에서 이러한 구분은 명확히 해야 한다.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지를 혼동하면 모든 것을 혼동하게 된다.

조각내는 사고방식으로 인해 개인과 사회에 생긴 위기도 결코 우연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조각내는 사고방식은 무질서하고 무의미한 충돌만을 끝없이 일으키며 어떠한 노력도 반대되거나 엇갈려 버리게 만들어 소모전이 돼 버린다.

따라서 우리 삶 전체에 파고든 뿌리 깊은 혼란을 해소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고 시급하다.

만일 당신이 같은 것을 다르게 보고 다른 것들을 같게 보는 정신 혼란에 빠져 있다면 사회, 정치, 경제적 노력이 모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론은 '실재 그대로에 대한 기술'이 아닌 늘 변화하는 통찰 방식임을 고려해 이를 진지하게 다뤄야 한다.

이론은 함축된 실재를 드러내지만 실재 전체를 말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이 장에서 지금 하는 말 역시 같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여기서 하는 말들이 '전체와 조각내기에 대해 항상 참인 지식'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이 또한 문제를 새롭게 바라보기 위한 '하나의 이론'이다.

이러한 통찰이 분명한지 아닌지 그 한계는 어디까지인지에 대한 판단은 당신의 몫이다.

 

이러한 질문에서 미묘하면서도 까다로운 점은 바로 사고 내용과 사고 과정 사이의 관계가 의미하는 바를 명확히 밝히는 일이다.

조각내기가 생기게 된 주된 까닭도 사고 과정과 사고 내용이 충분히 분리, 독립되어 있다는 가정에 있다.

실제로 내용과 과정은 둘로 나뉘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단일한 전체 운동의 양면이다.

따라서 조각난 내용과 조각내는 과정은 함께 없애야 한다.

여기서 사고 과정과 내용이 하나라는 말은 상대론 및 양자론과 관련하여 논의되는 관측자와 관측된 대상이 하나라는 말과 흡사하다.

이런 성질의 문제를 제대로 보려면 사고 과정과 과정에서 나온 사고 내용을 분리하려는 생각에 빠져서는 안 된다.

우리가 할 일은 어떻게든 조각내기의 형성원인을 파악하는 일이다.

그래야 내용과 실제 과정을 전체 속에서 함께 그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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