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멘토 붓다>

2023. 11. 11. 10:52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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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마당>

 

일종의 맞춤식 교육이라고도 할 수 있다.

 

"지나치게 팽팽해도 안 되고 지나치게 느슨해서도 안 됩니다. 알맞게 줄을 조정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좋은 소리를 낼 수 없습니다."

"고행이 지나치면 마음이 격해져 고요해 질 수 없으며, 지나치게 풀어져도 게으름에 빠진다. 수행에서도 그대는 중도를 취해야만 한다."

 

마침내 눈이 멀게 되었다. 

그러나 육안은 멀었어도 대신에 마음의 눈이 열렸다.

마음의 눈이 열린다는 것은 깨달음의 눈이 열렸다는 것이다.

 

중도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중간한 것이 아니라 양쪽을 다 고려하는 가장 합리적인 길이다.

어떠한 것에도 치우치지 않고 가장 적절한 것을 취하는 것이기 때문에 중도의 실천이 쉽지는 않다.

 

진정한 수행은 몸과 마음을 항상 적절한 상태에 놓고 자기의 마음을 잘 관찰하는 것이다.

늘 마음을 살펴서 제어하는 것

참선을 하든 일상생활을 하든 항상 마음을 고요히 하여 스스로를 제어할 줄 알아야 한다.

중도의 입장에서 심신의 조화를 이루어 밝은 지혜와 자비가 우러나오도록 해야 한다는 뜻이다.

 

진정으로 물려줄 재산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도를 닦아 깨치는 정신적인 것이라고 하셨다.

붓다께서는 아들 라훌라를 진정으로 사랑하셨기 때문에 세속의 영화보다는 진리의 열매, 해탈이라는 궁극적인 행복을 가져다주기 위해서 고생을 시키신 것이었다.

자식에 대한 지나친 욕심과 기대 때문에 바른 교육이 될 수 없고, 자식 또한 부모에게 너무 의지하려고 하기 때문에 가르침이 제대로 전달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걱정하지 말라. 어리석은 것을 스스로 아는 자는 지혜로운 자이다."

"티끌을 털고 때를 닦아 없애라."

 

'티끌과 때에는 두 가지의 의미가 있다. 하나는 안에서, 또 하나는 밖에서 온다. 밖의 때는 재와 흙처럼 눈에 보이는 더러움이다. 안의 때는 마음의 더러움이다.'

'티끌이나 때는 탐욕이다. 지혜로운 자는 이 탐욕을 없앤다. 지혜로운 자는 성내는 마음을 없앤다. 지혜로운 자는 어리석음도 없앤다.'

 

"마음의 때와 티끌을 없앤다는 뜻을 이제야 겨우 알았습니다. 없앤다는 것은 깨달음입니다. 그리고 때와 티끌은 마음의 결박입니다."

"없앤다는 것은 깨달음이며 때와 티끌은 마음의 장애이다."

"하나의 법구라도 그 뜻을 참으로 알고 그것을 실천하면 도를 얻을 수 있다."

 

서로서로 존경과 신뢰를 통하여 화목해 질 수 있는 방법

불교에서는 모든 이들을 나와 한 몸으로 본다.

서로 의존하며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구조, 부패한 정치인을 탓하기도 하지만 그것 또한 사회 구성원인 우리들이 만들 것이다.

붓다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 밭이 잘 가꾸어질 때 그 사회가 건전해진다는 것을 아셨다.

건전한 사회의 기틀은 개개인의 마음을 바르게 가지는 것에서 시작되어야 하고, 사람 사람들의 바른 마음이 메아리처럼 물결처럼 퍼져 나갈 때 이 사회는 근본부터 건전하고 행복해지는 것이다.

 

바른 방법으로 부를 쌓는 것은 권장한다.

단지 재물을 구하되 정당한 방법으로 구해야 한다.

재물은 살아가는 데 있어서 편리함을 준다고 생각해야지 궁극의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

대산을 나누어 적절하게 쓰되, 보시를 염두에 두고 살면서 마음을 평화롭게 유지하는 것이 곧 재가자들의 행복이다.

 

우리는 우리의 노력 여하에 따라서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

우리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이 업이 되어 우리의 미래를 바꾸어 놓는다.

과거에 나쁜 업을 지어 나쁜 결과를 받고 있더라도 지금부터 노력하면 삶이 밝게 열린다.

인과의 이치를 절대적으로 믿고 거기에 따라 선업을 지어나가는 것이다.

순간순간을 방심하지 말고 자신을 살펴 바른 길로 나아가야 한다.

과거와 미래에 대해 걱정하지 말고 지금 바로 이 순간 정신을 놓지 말고 잘 살피고 관찰하라.

 

나의 잘못을 깨우쳐 주고 나의 부족한 점을 채워줄 수 있는 선지식을 좋은 벗이라고 한다.

서로가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이 인간 세상이다.

붓다께서는 도를 완성하는 전제조건으로서 좋은 벗과 사귀고 함께 생활하는 것을 들고 있다.

바른 길로 이끌어 주고 깨우쳐 줄 선지식을 사귀라는 말씀이다.

스스로 남의 선지식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내가 먼저 친구를 위하여 헌신하고 마음을 기울일 때에 선지식을 만날 수 있다.

좋은 벗을 사귄다고 하는 것은 혈연관계를 넘어서서 다른 사람과 사귀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를 위해서 무엇인가를 할 때 더 힘을 낸다.

 

불교 수행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몸과 마음을 살펴 탐욕이 일어나고 성을 내며 어리석은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 바로 수행이다.

 

어떤 것에 얽매이고 집착하여 그것 때문에 괴로워하다가 그러한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되면 그것이 해탈이다.

 

술, 담배, 도박, 이성, 재물, 명예 등 우리의 마음을 얽어매어 괴롭게 만드는 집착에서 벗어날 때 우리는 그만큼 해탈했다고 말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의 뛰어난 점을 존경하고, 만족을 알며, 주위 사람들과 보이지 않는 중생들의 은혜를 알고, 그러한 은혜를 갚을 것을 생각한다면 사람들과 충돌할 일이 없을 것이다.

불교에서는 늘 상대적인 것을 생각하라고 한다.

그런데도 우리는 늘 상대적인 이칠르 모르고 어느 한쪽에만 집착한다.

이 우주는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하며 관계를 맺고 있는 연기의 세계이다.

 

그저 내 마음의 움직임을 항상 잘 살펴서 그 마음을 잘 다스리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일에 흔들리지 않고 근심도 성냄도 없이 편안함에 머무르면 이보다 더한 행복은 없다.

바로 이 순간, 내가 가진 지나친 욕심과 집착, 나쁜 습관을 버리고 주위 사람들을 존중하고 자비로써 대한다면 그것이 곧 행복인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도 가지지 말고

미워하는 사람도 가지지 말라.

사랑하는 사람은 못 만나서 괴롭고

미워하는 사람은 만나서 괴롭다.

 

우리가 정말 두려워할 것은 실제로는 별로 없다.

모두가 가공의 것, 혹은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때문에 번거롭고 괴로운 일이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붓다께서는 두려움을 번뇌로 일으키는 악행으로 보신 것이다.

 

"미움은 미움으로써 풀어지지 않고 미움을 버릴 때에만 풀어진다."

 

농사를 짓는 것은 밭을 갈고 씨를 뿌려 양식을 얻기 위한 것이다.

불교는 인간의 황폐한 마음을 갈아 거기에 지혜릐 씨를 뿌리고 정진으로써 번뇌의 잡초를 제거하여 마음의 양식을 마련하게 해 주는 것이다.

불교 수행자는 사람들로 하여금 지혜를 개발하여 진정으로 행복해 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어야 한다.

 

순간순간 우리의 마음이 어떤 작용을 하는가에 따라서 지옥도 되고 극락도 된다.

깨달았다고 해서 우리의 몸이 총칼도 뚫지 못하는 금강불괴의 몸이 된다든지 극락정토로 바뀌는 것이 아니다.

깨달음에 의하여 지혜와 자비가 충만해졌을 때 세상이 다르게 보인다.

내면의 세계가 변하는 것이다.

 

사람은 그 출생에 따라 천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또한 그 출생에 따라 성자가 되는 것도 아니다.

사람은 그 행위에 의해서 천한 사람이 된다.

그리고 그 행위에 의해서 성자가 된다.

 

"참회하여 증득한 자는 마치 바다에 흘러온 흙탕물이 맑아지듯이 과거의 죄업은 사라진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참회하는 것은 새롭게 태어나기 위한 다짐이다.

참회를 함으로써 업장을 가볍게 할 수 있다.

 

자신의 죄과에 대해 참회를 하거나 자비심을 내면 혈액 속에 면역 기능이 현저히 증가한다.

참된 믿음은 매일매일 자신의 죄과를 참회하는 데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거창한 성불을 지향하기 전에 먼저 일상의 신행을 통하여 자신을 깨끗하게 맑히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여자는 얼굴이 아름답다 하여 교만해서는 안 된다. 얼굴이 고운 것은 진실한 아름다움이라 할 수 없다. 마음과 행실이 좋아야 사람들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는다. 얼굴이 고운 것으로 어리석은 자를 유혹할 수는 있어도 유혹되지 않는 자의 존경은 받지 못한다. 그것은 하늘과 사람이 기뻐하는 바가 아니다. 타인의 노리개가 되기에는 적합하나 훌륭한 사람이 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셋째 마당>

 

"나는 보통사람이 보지 못하는 것을 꿰뚫어보는 천안으로 중생들의 나고 죽는 일, 좋은 곳과 나쁜 곳에 가서 태어나는 일, 좋은 몸과 나쁜 몸을 받는 일, 잘나고 못난 용모를 받는 일 등이 그가 짓는 행위에 따른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보니 어떤 중생은 몸과 입과 마음으로 악행을 짓고 현성을 비방하며 삿된 견해에 따라 삿된 행위를 지어서 목숨을 마친 뒤 지옥에서 태어나고, 어떤 중생은 몸과 입과 마음으로 선을 행하고 현성을 비방하지 않으며 바른 견해에 따라 바른 행위를 지어서 목숨을 마친 뒤 인간 세상에 태어난다."

 

"나는 청정한 삼매의 마음으로 번뇌 없는 심해탈과 혜해탈을 이루었다. 그리하여 번뇌와 생사의 속박에서 벗어났고, 모든 삿되고 치우친 행을 여의어 오로지 바른 행과 바른 정진을 하게 되었으며, 해야 할 일을 다 행해서 다시는 후세에 생명을 받지 않게 되었음을 진실 그대로 알았다. 곧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이룬 것이다."

 

붓다께서는 쾌락과 고행이라는 양 극단을 버리고 중도의 길을 택함으로써 심신의 조화를 이루었다.

 

사람들이 대부분 기적이라고 믿는 것도 알고 보면 인과의 법칙, 자연의 법칙에서 벗어나는 것이 없다.

그러나 사람의 지혜가 거기에 미치지 못하거나 인과 관계를 밝히지 못했을 때는 기적같이 보일 뿐이다.

 

붓다의 깨달음은 새벽 별이 빛나는 순간 갑자기 얻어진 것이 아니라 오랜 준비 기간이 있었다.

세속에 살면서도 집착과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청정히 하여 살아간다면 그가 곧 수행자라고 하셨다.

굳이 출가를 하지 않아도 붓다의 가르침만 잘 이해하고 따라가면 얼마든지 성불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

 

진리를 깨치는 데 있어서 선정이나 명상 그 자체가 궁극적인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선정이나 명상은 우리의 일상에 많은 도움을 주지만 그것은 우리가 진리를 체득하기 위한 수단이지, 최종 목표가 아니다.

신비한 능력, 신통력을 자랑하는 사람들은 명상을 잘못해서 헛것을 보고는 스스로 깨달았다는 착각에 빠질 수 있다.

이러한 것들은 진리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는 행위이다.

선정을 통해 어떤 상태에 들든 그것은 깨달음의 지혤르 여는 것이 아니라 단지 명상 가운데에서 그 순간을 즐기는 것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붓다의 선정은 즐기는 것을 초월하여 참된 지혜를 계발하기 위한 것이다.

 

붓다께서 선정주의와 고행주의를 모두 버리고 독자적인 방법으로 택한 것은 육체와 정신을 분리해서 보는 극단주의가 아니라 심신을 하나로 보는 중도였다.

몸과 마음의 최적의 상태에서 지혜를 밝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붓다의 수행법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당장 실천할 수 있고 그 효과를 입증할 수 있는 것이 불교 수행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그저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면 저것이 생긴다.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고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이 사라진다.

 

붓다의 깨달음은 수학 문제를 푸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라 언어를 초월한 직관에 의한 깨달음이었다.

경전에서는 그것을 '모든 법이 모습을 드러내었다'고 표현하고 있다.

그 깨달음은 논리나 말로는 도저히 나타낼 수 없는 직관의 세계였던 것이다.

그 순간을 말로 표현하자면 끝이 없지만 마음에 와 닿는 한 생각으로 모든 사실이 파악되고 그것의 전모가 떠오를 때가 있다.

언어와 논리를 초월한, 글자 그대로 모든 진리가 그 모습을 나타내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현상이나 존재는 어느 것에나 원인에 의하여 생기는 것이며, 그러한 현상이나 존재는 그 원인이 소멸하면 함께 소멸한다.

이렇게 모든 현상이나 존재들이 서로 의지하여 발생하고 그 발생의 원인이 사라지면 그러한 것들도 사라지는 법칙이 연기이다.

 

무명은 진리에 대한 근본적인 무지, 즉 어리석음을 말한다.

항상 변화하는 것을 영원한 것으로 집착하는 어리석음과 절대적인 자아가 없음에도 그것을 있다고 집착하는 어리석은 무명에 의해서 행이 있게 되는 것이다.

행은 몸과 입과 마음으로 짓는 어리석은 업솩 같은 뜻인데, 특히 변하는 것을 고정시키려는 작용을 한다.

식은 식별하고 분별하는 마음의 작용을 말한다.

명색에서 명은 느낌, 생각, 의도와 같은 정신적인 것이며, 색은 물질적인 것을 의미한다.

육처는 안, 이, 비, 설, 신, 의의 육근을 말한다.

촉은 대상과 접촉하는 것을 말한다.

수는 즐겁고 괴로운 것을 느끼는 것이다.

애란 수를 통해서 받아들일 때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는 욕구를 느끼고 싫어하는 것은 배척하려고 하는 것이다.

취는 좋은 것에 대해 집착하여 가지려는 것이다.

유는 존재를 가리킨다.

생은 태어나는 것이다.

 

"모든 괴로움의 원인은 무명이고 무명을 제거하면 모든 괴로움은 사라진다."

 

진리를 듣고 보아 혼자서 만족함은 즐거움이다.

생명을 해치지 않아도 즐거움이다.

애욕을 극복하여 세상사에 집착하지 않음도 즐거움이다.

그러나 나라는 교만심을 누를 줄 아는

이것이 최상의 즐거움이다.

 

<넷째 마당>

 

나는 이제 위없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러나 이 진리는 지극히 깊고 미묘하여서 이해하기도 어렵고 보기도 어려워 고요하고 청정하며 지혜로운 자만이 알 수 있을 뿐 범부는 도저히 알 수 없다.

이것은 중생들이 각기 다른 생각을 가지고 각자의 견해에 따라 제각기 구하는 바를 즐기고 제각기 익한 바에 충실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깊고 미묘한 인연을 알 수가 없다.

그러니 애욕이 멸한 열반은 더욱 알기가 어렵다.

내가 만약 이들에게 이러한 이치를 설한다고 하여도 그들은 틀림없이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든지 혼자서는 세상을 살아갈 수 없다.

연기로써 이루어진 세계이기 때문이다.

서로 의존하고 서로 관계를 맺으면서 모든 현상이 발생하고 소멸한다.

붓다께서 아무리 위대한 진리를 발견하셨다고 해도 그것을 가슴속에 간직한 채 돌아가셨다면 바이나 나무와 별 다른 점이 있겠는가?

사상이나 문학, 예술도 혼자 하는 것은 의미가 없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표현해서 그것이 공감을 얻을 때 비로소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나 이제 감로의 문을 여나니 귀 있는 자는 들으라.

낡은 믿음은 버려라.

 

낡은 믿음을 버리라는 것은 그때까지의 모든 어리석은 믿음을 버리고 붓다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는 뜻이다.

지혜로 괴로움의 실상을 파악하고 그 원인을 밝혀 영원히 괴로움을 없애는 새로운 진리에 귀를 기울이라고 말씀하셨다.

 

바른 견해를 가지고, 바르게 생각하고, 바른 말을 하며, 바른 행위를 하고, 바른 직업을 가지며, 바른 정진을 하고, 바른 도리를 잊지 않으며, 마음을 늘 고요하게 가짐으로써 괴로움을 멸하는 것을 말한다.

여덟 가지 바른 도를 실천하여 괴로움을 없앨 수 있다는 것이 도성제다.

 

설법이라도 쉽고 친절하게 베풀어야 할 것이다.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으며 끝도 좋은 조리 있는 법을 설하라."

누구라도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논리에 맞고 정확한 표현을 하라.

설법하는 사람이 청정한 행을 해야 대중의 신뢰를 받고 불교를 전할 수 있다.

 

출가하여 조용한 곳을 찾아 수행하는 것도 좋지만 시끄러운 세속에 살면서도 청정함을 유지하고 주위 사람들에게 모범이 되고, 그들을 여러 모로 돕는다면 그것이 붓다의 말씀을 더 잘 실천하는 것임을 알려주는 것이다.

 

대승불교에서는 출가와 재가를 구분하지 않고 우리의 마음이 어디를 지향하느냐, 어떤 상태를 유지하는가를 더 중시한다.

 

연기의 이치에 대해 훤히 꿰뚫고 있으면 온 세상의 구조와 변화에 대한 것을 다 알 수 있으므로 그야말로 최고의 지혜라고 할 수 있다.

이 세상 모든 번뇌가 다 사라진 마음으로 세상일을 보면 훤하게 보일 것이다.

누진통은 바로 그러한 지혜를 말한다.

 

기적처럼 보이는 것도 단지 그러한 현상의 원리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지 잘 관찰해 보면 결코 인과의 법칙을 무시하고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우선 이 번뇌의 불을 꺼야 한다.

우리가 수행을 하는 것은 마음의 번뇌를 끄기 위함이지 복을 빌고 명을 빌기 위한 것이 아니다.

탐, 진, 치의 불을 꺼서 괴로움에서 벗어나야 한다.

모든 것이 불타고 있다는 붓다의 말씀에서 열반의 의미를 되새겨야 한다.

열반은 번뇌의 불꽃이 꺼져서 잠잠하게 되는 상태이다.

불꽃을 껐을 때 비로소 마음의 평안을 얻고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늘 마음을 살펴서 번뇌의 불꽃이 타오르지 못하게 해야 한다.

 

육근과 그 대상에 대해서 탐내는 마음을 없애야 된다.

아름다운 것만 보고, 좋은 소리를 듣고, 좋은 냄새를 맡으며, 맛있는 것만 먹고 싶고, 좋은 감촉을 즐기고 싶어 한다.

이것은 즐겁고 편안한 것을 누리려는 마음이다.

또한 존경받고 싶고, 사랑받고 싶고, 잘난 체하고 싶다.

범부 중생들은 다 이러한 것들이 힘이 되어 살아간다.

그렇지만 탐착이 지나칠 때 화근, 괴로움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마음을 잘 다스려 탐, 진, 치의 번뇌의 불꽃을 꺼버리면 모든 것이 잠잠해진다.

 

<다섯째 마당>

 

계를 지키는 것은 열반으로 가기 위한 수단이지 계를 지키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붓다께서도 세세한 계율의 조항에는 구애받지 말라고 하셨던 것이다.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어떤 한계를 지어 놓고 거기에 집착하는 것은 열반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도리어 장애가 될 수 있다는 말씀이다.

 

극악한 죄를 지었으나 참으로 뉘우치면 죄가 소멸한다.

날로 뉘우쳐 그치지 않으면 죄의 뿌리를 뽑을 수 있다.

내 마음이 자비로 가득 차 있으면 극락정토이다.

우리는 끝까지 늘 자신의 허물을 살피고 참회함으로써 순간순간 새롭게 태어날 수 있다.

우리 마음을 어떻게 향하느냐에 따라서 늘 극락에 살 수도 있다.

 

 

출처: <내 인생의 멘토 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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