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5. 1. 08:22ㆍBook
* 유머
일반적으로 말하면, 유머는 두 사건이 이성적으로는 연결될 수 없는 상황, 즉 연관이 없는 두 가지 일이 동시에 일어나거나 서로 모순되는 역설적 상황에서 발생합니다.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우리는 웃음을 통해 쉽게 견뎌냅니다.
이것이 키르케고르가 말한 "시적 가능성"입니다.
유머는 가혹한 현실에서 부딪치는 삶의 부조리함을 긴장을 푼 채 즐길 수 있는 것으로 승화시킵니다.
이런 점에서 웃음에는 우리 어깨에 올려진 짐을 덜어주는 효과가 있죠.
고되고 심각하며 막막한 상황에서 특히 그렇습니다.
유머 덕에 우리는 합리적인 답이 보이지 않는 상황과 거리를 둘 수 있습니다.
그러면 도움이 절실한 난관에 부딪히거나 위기에 빠졌어도 마음을 좀 더 편하게 먹을 수 있답니다.
히포크라테스에 따르면 체액의 균형이 맞을 때 가장 건강하고 균형이 깨지면 병이 생깁니다.
아울러 네 가지 체액 중 어떤 것이 우위를 오래 차지하느냐에 따라 다혈질(혈액), 점액질(점액), 담즙질(황담즙), 우울질(흑담즙) 등으로 규정되는 특정한 기분이나 마음, 정신 상태가 나타난다고 합니다.
* 억압
우리의 영혼은 얼마나 친절한가.
영혼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생기면 그 기억을 꽁꽁 묶어 우리에게서 빼앗는다.
이와 달리 모든 일을 잊지 않는 정신은 '사고하지 말라'는 명령에 불복해 맞서 싸운다.
물론 승리를 거두지는 못하지만 영혼의 배에 가스를 차게 하고, 그 가스는 결국 불편한 감정을 느끼거나 자기 파괴적 행동이 나타날 때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배출된다.
하지만 어느 순간 위험이 사라졌다고 느낀 영혼이 숨겨진 기억을 풀어주면, 정신은 그 기억을 붙잡아 적절히 처리한다.
이로써 영혼은 잠시 고통을 느끼지만 동시에 악몽 같은 소동도 막을 내린다.
물론 영혼은 나쁜 뜻에서 그런 건 아니었으리라.
충격적인 경험으로부터 아이를 지키는 일은 당연히 중요하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인데, 이 점을 우리의 착한 영혼은 알지 못한다.
영혼은 숨기 급급한 어린아이로 영원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정신은 냉철하다.
정신은 인식을 추구하고, 영혼은 위로를 구할 뿐이다.
쇼펜하우어는 <도덕의 기초에 관하여>에서 '인간은 이성적인 동물'이라는 기존 철학과 정반대로 이성을 '이차적'이고 부차적인 것으로 깎아내립니다.
흔히들 생각하듯 인간은 빛나는 자태를 뽐내는 이성적 존재가 아니며, 우리를 이끄는 것은 오히려 이성을 무력화시키는, '이해할 수 없는 동기들'이라는 것입니다.
쇼펜하우어는 인간은 이성이 아닌 '그의 실제적인 자아', 즉 '의지'가 존재의 핵심이라고 합니다.
의지만이 '절대적으로 주어지고 존재하는 것'이라고 했죠.
하지만 의지가 우리를 이끄는 근거와 동기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 감춰져 있습니다.
"저 바깥에는 위대한 밝음과 명료함이 있다. 하지만 안쪽은 검은 칠을 한 망원경처럼 깜깜하다. 어떤 선험적 원칙도 자기 안에 있는 밤을 밝히지 못하고, 이런 등대들은 바깥으로만 빛을 비출 뿐이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자유는 깨어 있는 눈으로 내면을 성찰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자유의 목표는 개인적인 것, 즉 내밀한 것입니다.
그러려면 먼저 행동으로 이끄는 가장 강력한 동기를 알아야 하죠.
그래서 쇼펜하우어는 '자기 인식'이야말로 자유를 위한 발판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이 자유로워지려면 먼저 자기 자신부터 탐구해야 합니다.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무엇을 성취할 수 있는지 알면 자신의 성격과 재능에 맞는 것이 무엇인지 자각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자유는 자기 선택이고, 자기 고유의 개성을 깨닫고 긍정하는 것이 됩니다.
프로이트는 의식의 깊은 근원을 의식과 구분하여 '무의식'이라 불렀습니다.
그는 이 무의식에 무엇이 있는지 파악하려면 큰 노력이 필요하다고 지적했습니다.
달갑지 않거나 난처하고 감당하기 힘든 경험들은 억압되어 무의식으로 추방되고, 그저 막연하고 불분명한 짐작만 남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의식으로부터 억압된 감정이나 소망이 심리적 장애를 일으켜 당사자를 끝없이 짓누르며 병들게 만든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입니다.
흥미롭게도 프로이트는 '억압'을 인간의 타고난 심리 메커니즘으로 보았습니다.
다시 말해 일단 어떤 경험이 '해롭거나 감당하기 힘든 것'으로 분류되는 순간, 기억을 지워 심리적 안정 효과를 가져다주도록 생물학적으로 짜인 일종의 비상 프로그램이라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성공적으로 방어한다면 관련된 경험은 사실상 잊힙니다.
하지만 심한 트라우마를 겪었다면 사정이 그리 간단치만은 않습니다.
극단적인 경우, 트라우마의 경험은 치명적 결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당신에게는, 직접 설명했듯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 쾌락
"모든 선의 원천과 뿌리는 위장의 쾌락이다. 왜냐하면 현명하고 고상한 것조차 결국 여기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현명하든 고상하든 모든 행동은 결국 쾌락 또는 이득을 노린 것이라는 거죠.
이로 인해 무수한 비판의 목소리가 에피쿠로스에게 쏟아졌습니다.
그래도 에피쿠로스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이 철학자는 "나는 쾌락을 주지 않는 고상한 것을 경멸하고, 덮어놓고 이것을 감탄하는 이들도 경멸한다"고 했습니다.
위선이야말로 에피쿠로스가 가장 혐오한 것이었습니다.
에피쿠로스는 쾌락을 경멸하는 사람은 쾌락을 온전히 경험하고 유지하는 방법을 모르는 자라고 지적하죠.
쾌락이란 '끝이 없어서 절대 만족할 수 없는 것'이라는 잘못된 생각이 원인이라고 했습니다.
또 이런 오해가 쾌락은 깊이가 얕아서 가치가 없고, 이 때문에 철학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또 다른 착각으로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헤아릴 길 없고 붙잡을 수도 없으며, 측정할 수 없고 끝도 없는데 어떻게 '텔로스', 즉 우리가 추구해야 할 궁극적인 목표로 삼을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그 목표를 향해 갈 수 있겠습니까?
이에 대해 에피쿠로스는 '모든 고통으로부터 해방될 때 쾌락은 최대치에 도달하고', 쾌락은 이 최대치를 넘어 '변화할 수는 있지만 더 늘거나 풍부해질 수는 없다'는 논리로 반박합니다.
그에게 있어 쾌락은 더하기가 아니라 빼기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고통이 사라진 그 상태야말로 쾌락의 한계이자 쾌락을 측정할 수 있는 기준입니다.
그 이상의 즐거움(쾌락)은 아무리 노력해도 절대 얻을 수 없습니다.
에피쿠로스는 현재에 집중합니다.
"우리는 단 한 번 태어날 뿐이다. 두 번 태어날 수 없고, 영원히 존재할 수도 없다. 그런데 내일의 주인이 아닌 당신이여, 당신은 기쁨을 미루고 있다. 우리가 주저하는 동안 인생은 흘러가고, 우리 각자는 쉼 없이 일하는 가운데 죽고 만다."
다만 에피쿠로스가 말하는 쾌락은 방탕하거나 환락이 아닙니다.
모든 고통이 사라져 마음이 고요하고 평안해진 상태가 이어지는 것.
에피쿠로는 이런 마음의 상태를 '아타락시아'라고 부르며 행복의 필수 조건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려면 세심하게 고른 친구, 정치적 불간섭, 건강에 좋은 음식 섭취, 은둔 생활 등이 필수라고 조언합니다.
또 언제 어디서나 적절한 수준을 유지해야 한다고 했죠.
자신의 재능과 능력, 재산을 적절히 파악하고 사용함으로써 우리는 큰 실망이나 의존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에피쿠로스는 항상 착시 없는 냉철한 태도로 마음의 고통에 직면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현명한 사람에게는 결국 쾌락(선)이 우세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철학도 이 같은 이득을 얻고자 존재합니다.
"어떤 결과도 내놓지 못한다면 사람들은 삶의 기술인 지혜를 추구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지혜야말로 쾌락을 찾고 얻어내는 일종의 발명가와도 같기에 사람들은 지혜를 추구한다"라고 말합니다.
그렇기에 마음의 불안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마음에서 슬픔을 몰아내고 불안과 두려움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은 오직 지혜뿐이기" 때문입니다.
* 희망
희망은 우리에게 날개를 달아줍니다.
미래를 기대하는 것을 넘어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꿀 힘도 줍니다.
이는 몸과 영혼과 정신에 똑같이 적용됩니다.
우리의 철학적 대화는 삶을 올바르게 성찰하도록 정신을 격려했습니다.
만약 어쩔 수 없는 일이 벌어진다 하더라도 삶의 마지막 순간을 평화롭게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반면 영혼에게는 긴장을 풀고 기쁨을 누릴 수 있는 휴식 장소가 필요합니다.
당신은 이미 그런 장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아름다운 사진들에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보면서 그 안에 얼마나 많은 사랑과 헌신을 쏟아부었는지 생생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마르틴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희망이란 현상을 "고양된 기분, 더욱 좋게 고양시키는 기분'으로 규정하고, 미래에 일어날 나쁜 일과 관련된 공포와 구별되는 희망의 특징은 미래에 좋은 일이 있을 것이란 기대감이다. 그러나 이 희망이라는 현상의 구조에서 중요한 점은 희망이 가진 미래적인 성격보다 희망이라는 존재 그 자체의 의미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이어 희망이라는 기분의 특징은 '자기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기대'한다는 데에 있어서 "희망하는 자는 자기 자신을 희망 속에 두고, 기대하는 것으로 자기 자신을 데려간다"고 설명했습니다.
간략히 말하자면 '희망하는 사람은 희망을 품고 기대하는 것을 향해 나아간다'라는 것이죠.
다만 이때 희망하는 사람이란 '자기의 고유한 삶을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을 전제로 한다고 조건을 달았습니다.
자신에 대해 어떠한 반성도 하지 않고, 남의 시선만 신경 쓰다가 결국 자신을 잃어버린 사람은 더 이상 희망이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희망을 품을 수도 없고 기대하는 것을 향해 나아갈 수도 없습니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인간이 희망을 성취하는 것은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가 자신이 던져진 세계와 맺는 '탈자적-시간적 관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희망을 품은 인간은 '내던져진' 대로 자신을 내맡기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되는 대로 살고, 기다리고, 잊어버리고, 무관심한 채로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탈자적으로, 즉 열광하고 도취된 채로, 모든 일이 잘되는 상황을 머릿속에 그리고자 합니다.
그러면서 안심하게 됩니다.
설령 나중에 바라던 것이 이루어지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실행력과 용기를 갖게 되죠.
출처: <삶을 의미 있게 만들어주는 일상의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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